아시다시피 토비트서는 자선에 대한 교훈서입니다.
그리고 좋은 일을 하는데도 갖가지 시련을 당하다가
마침내는 복을 받는다는 전형적인 Happy ending story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주 진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착한 사람이 고통 받고 나쁜 짓 하는 사람이 오히려 잘 사는가?
이것이 우리 사는 세상인데 착하게 살 필요가 있는가?
이런 물음에 나중에 결국 복을 받는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있을까요?
이걸 믿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토비트의 아내도 그러했기에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하고 비웃습니다.
우선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느냐는 문제.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지 않아야 됩니까?
착한 사람은 고통을 받지 말아야 하고
악한 사람이 고통을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착하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자기가 착한가?
악한 사람이 잘 산다고 하는데 돈이 많다고 그가 잘 사는 것인가?
그런데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고통을 죄의 벌로써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의 벌로써 고통도 있지만
고통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조건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유한성으로 인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고통을 받는데
다만 악한 사람이 그 악함으로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더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렇다면 착하게 사는 이유,
선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미래의 축복,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도 있지만
착함, 선행은 그 자체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착함이란 선을 내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악을 안에 지니고 있는 악함보다는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선행이란 선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선행을 하는 사람은 악행을 하는 사람보다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 반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악을 늘 지니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리고 악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도저히 선행을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착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선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래서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상선(至上善)이신 하느님,
모든 선이신 하느님,
충만한 선이신 하느님,
전체 선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그 얼마나 축복이고
그런 착한 사람은 그 얼마나 행복한지요?
그리고 좋은 일을 하는데도 갖가지 시련을 당하다가
마침내는 복을 받는다는 전형적인 Happy ending story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주 진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착한 사람이 고통 받고 나쁜 짓 하는 사람이 오히려 잘 사는가?
이것이 우리 사는 세상인데 착하게 살 필요가 있는가?
이런 물음에 나중에 결국 복을 받는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있을까요?
이걸 믿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토비트의 아내도 그러했기에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하고 비웃습니다.
우선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느냐는 문제.
착한 사람이 왜 고통을 받지 않아야 됩니까?
착한 사람은 고통을 받지 말아야 하고
악한 사람이 고통을 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착하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자기가 착한가?
악한 사람이 잘 산다고 하는데 돈이 많다고 그가 잘 사는 것인가?
그런데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고통을 죄의 벌로써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의 벌로써 고통도 있지만
고통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조건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유한성으로 인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고통을 받는데
다만 악한 사람이 그 악함으로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더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렇다면 착하게 사는 이유,
선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미래의 축복,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도 있지만
착함, 선행은 그 자체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착함이란 선을 내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기에
악을 안에 지니고 있는 악함보다는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선행이란 선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니
선행을 하는 사람은 악행을 하는 사람보다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 반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악을 늘 지니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리고 악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도저히 선행을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착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선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래서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상선(至上善)이신 하느님,
모든 선이신 하느님,
충만한 선이신 하느님,
전체 선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그 얼마나 축복이고
그런 착한 사람은 그 얼마나 행복한지요?
惡 은 고통이고 불행 입니다.
善 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니 행복 입니다.
자신들의 영악함으로 순수한 사람들을 짓밟고
그것이 경쟁의 당연한 결과라고 여기는 눈앞의 현실을 보면서도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하고 비웃는
토비트 아내의 말은 비단 그 옛날 토비트 아내의 말만은 아닌 듯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줌으로써 받는다는 것을 우리의 체험을 통해
또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순간도 있지요.
단 우리가 깨여있는 순간,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늘 깨여있으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악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도저히 선행을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착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선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래서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
선이신 하느님을
오늘 새벽에도 모셨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 묵상을 통해
매일 한걸음씩 내딛고 있는
지금 여기의 "나"는
그 얼마나 행복한지요?
.........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