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보면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너무 허무합니다.
요망한 계집의 한 낱 춤 값 정도에 불과한
정말 너무 값어치 없는 죽음 같아 허망합니다.
허무하고 허망한 죽음이 아니라
최고 권력자의 불의를 질타하고 죽은 정말 의로운 죽음이라고 쳐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축일의 감사송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는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하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샅샅이 뒤져도
그의 죽음과 주님과의 상관성을 발견할 수 없고
주님을 위해서 죽는다는 언표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감사송에서 노래하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주었고,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내용은 맞지만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다는 말은 지나친 말처럼 보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물 한 잔을 마셔도 주님을 들이키는 마음으로 마시고
반찬 하나를 먹어도 주님이 원하실까 생각하고 먹으면 성사가 될 텐데!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어도 주님을 위해 주스면
주님을 위한 희생이 되고 봉헌이 될 텐데!
그러나 이런 의식적 행위는 많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는 무의식적 행위입니다.
사랑의 문제겠지요.
사랑을 하면 오매불망(寤寐不忘)
밥을 먹건 일을 하건 사랑하는 사람과 연관 짓고
사랑을 하면 무의식에서조차도 사랑하는 사람과 연관을 짓는데
사랑이 없이 무엇에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기란 너무도 쉽지 않습니다.
저는 세례자 요한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뼈 속까지 스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라는 의식이 태어나서부터
그에게 박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식은 단순한 사랑 감정에 의한 의식과는 다른
운명 공동체적인 의식,
마치 샴 쌍둥이처럼
분리수술을 하지 않는 한 무엇을 하건 같이 해야 하는
다른 존재의 동일 운명체적인 의식입니다.
그러니 시간과 장소는 달라도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희생, 타살이라는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 운명체일 수밖에 없고,
선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폭행의 희생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례자 요한의 수난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나의 신원의식이
뼈 속 깊이 새겨지기를 간절히 비는 오늘입니다.
요망한 계집의 한 낱 춤 값 정도에 불과한
정말 너무 값어치 없는 죽음 같아 허망합니다.
허무하고 허망한 죽음이 아니라
최고 권력자의 불의를 질타하고 죽은 정말 의로운 죽음이라고 쳐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축일의 감사송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는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하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샅샅이 뒤져도
그의 죽음과 주님과의 상관성을 발견할 수 없고
주님을 위해서 죽는다는 언표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감사송에서 노래하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주었고,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내용은 맞지만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다는 말은 지나친 말처럼 보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물 한 잔을 마셔도 주님을 들이키는 마음으로 마시고
반찬 하나를 먹어도 주님이 원하실까 생각하고 먹으면 성사가 될 텐데!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어도 주님을 위해 주스면
주님을 위한 희생이 되고 봉헌이 될 텐데!
그러나 이런 의식적 행위는 많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는 무의식적 행위입니다.
사랑의 문제겠지요.
사랑을 하면 오매불망(寤寐不忘)
밥을 먹건 일을 하건 사랑하는 사람과 연관 짓고
사랑을 하면 무의식에서조차도 사랑하는 사람과 연관을 짓는데
사랑이 없이 무엇에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기란 너무도 쉽지 않습니다.
저는 세례자 요한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뼈 속까지 스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라는 의식이 태어나서부터
그에게 박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식은 단순한 사랑 감정에 의한 의식과는 다른
운명 공동체적인 의식,
마치 샴 쌍둥이처럼
분리수술을 하지 않는 한 무엇을 하건 같이 해야 하는
다른 존재의 동일 운명체적인 의식입니다.
그러니 시간과 장소는 달라도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희생, 타살이라는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 운명체일 수밖에 없고,
선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폭행의 희생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례자 요한의 수난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나의 신원의식이
뼈 속 깊이 새겨지기를 간절히 비는 오늘입니다.
주어진 일에
마땅이 해야 할 일에
아주 작은 일에도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합니다.
인간의 목숨을 살리고 죽이는 결정권은
하느님의 것이면서도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엄청난 힘을 오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앞에서
다시 한 번 깊이 묵상 해봅니다.
아니, 세례자 요한의 죽음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다른 이를 억울한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인간의 자유의지,
하느님의 영역을 넘어서는 가슴 아픈 현실 이 존재하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으로 저 역시 존재한다면
크게 다를 것 없는 거지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 한다”는 광고의 문구처럼
유한한 이 세상 선택의 분기점에 설 때마다 주어진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유한한 삶이 무한한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는 책임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
그러니 생각 없이 자유를 달라고 좋아할 것만은 못 된다 싶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오랫 만에 신부님말씀..무척 기쁩니다~*^^*
오매불망(寤寐不忘) 내 사랑되신 하느님!
저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오직 당신으로 인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나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