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의 말씀들은 매우 도전적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자극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언젠가 자식에 대해 욕심내는 부모님이 오셔서
자기 자식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한탄할 때
저는 요즘 자살하고 말썽부리는 젊은이가 많은데
그것만 아니어도 훌륭하다는 투로 위로를 하였습니다.
그런 제가 막상 저의 조카나 저의 수도원 형제들이
보통 사람으로 만족하며 살려고 하면
젊은 사람이 어찌 그렇게 꿈도 열정도 없냐고 속으로 한탄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오히려 문제가 아닌지,
보통 사람으로 살려는 조카나 형제들이 오히려
예수님이나 성현들이 가르치시는
그 현명과 행복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정말 어찌해야 할까요?
죄인들도 그것은 하니 죄인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야하지 않느냐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교만을 자극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일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는 그런 우월감이 대단했었습니다.
프란치스코처럼 가난하게 살고자 애를 썼는데,
예를 들어, 구호품으로 나온 서양 사람들의 큰 옷을
길이만 맞게 삭둑 잘라 입고는 시내를 활보하곤 하다가
당시 제 또래 애들이 멋을 부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저는 저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얼마나 속에 든 것이 없으면 저렇게 겉치장을 하고 다닐까’하고
오히려 그들을 낮추보며 으스댔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도전은
그런 비교 우위적 우월감을 자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지니라는 것이며
진정한 자존감과 자애심을 가지라는 것이며
굳이 비교한다면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와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래서 낮은 가치에 가치를 두지 않고
저열한 감정에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自重自愛합니다.
그리고 같은 무게와 같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합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옛날 법조계에서 높은 위치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런데도 본당의 궂은일을 손수 하시고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본당의 한 신자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을뿐더러 매우 소중하게 대하십니다.
어느 공동체에나 있기 마련인 진흙구덩이 싸움에는
절대로 끼어들지 않을 뿐더러
누가 막말을 해도 그분은 늘 그를 존중하는 말로 답합니다.
미움에 미움으로 응답하지 않고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속을 들어가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분에게는 사랑만이 있는 듯합니다.
그분을 보면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신 말씀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자극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언젠가 자식에 대해 욕심내는 부모님이 오셔서
자기 자식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한탄할 때
저는 요즘 자살하고 말썽부리는 젊은이가 많은데
그것만 아니어도 훌륭하다는 투로 위로를 하였습니다.
그런 제가 막상 저의 조카나 저의 수도원 형제들이
보통 사람으로 만족하며 살려고 하면
젊은 사람이 어찌 그렇게 꿈도 열정도 없냐고 속으로 한탄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오히려 문제가 아닌지,
보통 사람으로 살려는 조카나 형제들이 오히려
예수님이나 성현들이 가르치시는
그 현명과 행복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정말 어찌해야 할까요?
죄인들도 그것은 하니 죄인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야하지 않느냐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교만을 자극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일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는 그런 우월감이 대단했었습니다.
프란치스코처럼 가난하게 살고자 애를 썼는데,
예를 들어, 구호품으로 나온 서양 사람들의 큰 옷을
길이만 맞게 삭둑 잘라 입고는 시내를 활보하곤 하다가
당시 제 또래 애들이 멋을 부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
저는 저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얼마나 속에 든 것이 없으면 저렇게 겉치장을 하고 다닐까’하고
오히려 그들을 낮추보며 으스댔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의 도전은
그런 비교 우위적 우월감을 자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지니라는 것이며
진정한 자존감과 자애심을 가지라는 것이며
굳이 비교한다면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하느님 아버지와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래서 낮은 가치에 가치를 두지 않고
저열한 감정에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自重自愛합니다.
그리고 같은 무게와 같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합니다.
제가 아는 한 분은 옛날 법조계에서 높은 위치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런데도 본당의 궂은일을 손수 하시고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본당의 한 신자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을뿐더러 매우 소중하게 대하십니다.
어느 공동체에나 있기 마련인 진흙구덩이 싸움에는
절대로 끼어들지 않을 뿐더러
누가 막말을 해도 그분은 늘 그를 존중하는 말로 답합니다.
미움에 미움으로 응답하지 않고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속을 들어가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그분에게는 사랑만이 있는 듯합니다.
그분을 보면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신 말씀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입김으로 생각하니
사랑이 저절로 흐르겠지요 !
예수님께서 인간의 수준을 감안해서
눈으로 보고 느껴 알 수 있는 모델링이 되어주신 것처럼,
그리고 800년 전에 프란치스코 성인이 사셨던 것처럼,
또 다른 모델링이 되어야 한다는 존재의식, 책임감을 느끼지요.
제가 알고 지내는 지인은 같은 말이라도
상대에게 상처주지 않고 긍정적으로
예쁘게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아! 사람이 저렇게 맑고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며 늘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얼마든지 해석이 다를 수 있는데,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양 내 이야기를 틀렸다는 식으로
수정해주며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완곡한 사람을 지독히 미워하고
나하고는 수준이 안 맞는 다고 오히려 강한 침묵으로 응수 하는
교만한 저를 볼 때 마다 교만은 뒤집으면 열등감이라 던데!......
이런 저에게 오늘
주님은 정신 차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