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며 문득 30년 더 된,
그래서 까맣게 잊고 있던 군대 일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하사로 군 생활을 했습니다.
원해서 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체 건강하고 대학 나왔다고 하사로 뽑힌 것입니다.
그런데 하사가 된다는 것은
큰 고통을 겪어야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불행하고 운이 없다고 여겨지던 것이었습니다.
똑 같은 기간 군대 생활을 하는데
자기보다 군 생활을 조금 한 사람이 상급자가 되는 것을
상병이나 병장이 받아들이기 힘드니
졸병들을 시켜 어떻게 해서든지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의 괴로움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저의 선배 하사한테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매일 밤, 1-2시 쯤 술 먹고 들어와서는
잠자고 있는 저를 깨어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6개월을 그러하니
맞지 않으면 잠자리가 편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왜 하사가 되어가지고 병들한테 잘 해주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병들한테도 존댓말을 쓰고
한 번도 상급자로서 대우를 받으려들지 않고 시키지도 않았으며
가끔 하사들과 병들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지면
저는 하사들 편에 서지 않고 가운데서 뜯어말렸습니다.
그러니 저의 선임인 하사가 볼 때는 형편없는 하사였던 것이지요.
계속되는 구타에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지만
그래도 제가 꺾이지 않으니 6개월 쯤 되어서는
그 선임 하사가 저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습니다.
이때 이후 저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 생활 14 개 월 만에 내무반장이 되었는데도
병들이 저의 지휘를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제가 제대할 때
그 선임 하사가 일부러 찾아와 저에게 사과를 하고
사실은 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왜 이 이야기를 길게 했느냐 하면
고통은 승리하였을 때 현양 받는 것임을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심리학에서 새디즘과 매조히즘이 있습니다.
가학적 또는 피학적 성 도착증을 말함이지요.
그런데 십자가 현양은 고통을 받을 때 쾌감을 얻는
이 피학대성 만족과 다릅니다.
십자가를 현양하는 사람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통이 싫습니다.
고통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다른 점이며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고통을 기꺼이 받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사랑 때문에 기꺼이 고통을 받고
사랑 때문에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自己愛가 있는 것이며
고통보다 더 강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도 삶은 살 가치가 있다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것이요
고통 다음에는 반드시 고통도 어쩌지 못하는
자유로운 부활의 경지가 있음을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인생이 더욱 찬란해지고
사랑이 자라는 것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과 고통은,
사랑은 고통을 감수하게 하고
고통은 사랑을 자라게 하는,
변증법 관계입니다.
그래서 까맣게 잊고 있던 군대 일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하사로 군 생활을 했습니다.
원해서 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체 건강하고 대학 나왔다고 하사로 뽑힌 것입니다.
그런데 하사가 된다는 것은
큰 고통을 겪어야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불행하고 운이 없다고 여겨지던 것이었습니다.
똑 같은 기간 군대 생활을 하는데
자기보다 군 생활을 조금 한 사람이 상급자가 되는 것을
상병이나 병장이 받아들이기 힘드니
졸병들을 시켜 어떻게 해서든지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의 괴로움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저의 선배 하사한테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매일 밤, 1-2시 쯤 술 먹고 들어와서는
잠자고 있는 저를 깨어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6개월을 그러하니
맞지 않으면 잠자리가 편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왜 하사가 되어가지고 병들한테 잘 해주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병들한테도 존댓말을 쓰고
한 번도 상급자로서 대우를 받으려들지 않고 시키지도 않았으며
가끔 하사들과 병들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지면
저는 하사들 편에 서지 않고 가운데서 뜯어말렸습니다.
그러니 저의 선임인 하사가 볼 때는 형편없는 하사였던 것이지요.
계속되는 구타에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지만
그래도 제가 꺾이지 않으니 6개월 쯤 되어서는
그 선임 하사가 저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습니다.
이때 이후 저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 생활 14 개 월 만에 내무반장이 되었는데도
병들이 저의 지휘를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제가 제대할 때
그 선임 하사가 일부러 찾아와 저에게 사과를 하고
사실은 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왜 이 이야기를 길게 했느냐 하면
고통은 승리하였을 때 현양 받는 것임을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심리학에서 새디즘과 매조히즘이 있습니다.
가학적 또는 피학적 성 도착증을 말함이지요.
그런데 십자가 현양은 고통을 받을 때 쾌감을 얻는
이 피학대성 만족과 다릅니다.
십자가를 현양하는 사람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통이 싫습니다.
고통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다른 점이며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고통을 기꺼이 받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사랑 때문에 기꺼이 고통을 받고
사랑 때문에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에 굴복하지 않는 自己愛가 있는 것이며
고통보다 더 강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도 삶은 살 가치가 있다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것이요
고통 다음에는 반드시 고통도 어쩌지 못하는
자유로운 부활의 경지가 있음을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 때문에 인생이 더욱 찬란해지고
사랑이 자라는 것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과 고통은,
사랑은 고통을 감수하게 하고
고통은 사랑을 자라게 하는,
변증법 관계입니다.
구원 이며, 부활임을 묵상 합니다.
신부님 !
안녕히 다녀 오십시요 !
돌아오시면 뵙겠습니다.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성령께서 함께 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