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 (사부님 대축일 9일 기도 셋째 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먼저 오늘 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1) 요한과 제자들이 예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을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막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계십니다.
사도들은 이 질문과 함께 자신들이 내린 결론으로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들을 막았습니다. 특별히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일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의 문제는 몹시 미묘한 내용이었으며 다양한 해결책도 함께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그들의 행실로 판단하자’고 했고, 요한은 ‘예수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느냐의 여부로 판단하자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 사람의 자질과 신앙의 정도를 떠나서 교회 울타리 밖의 사람일지라도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바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짓게 하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말은 오늘 복음 가운데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43절부터 마지막까지 나오는 내용 또한 타인을 죄짓게 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죄에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며 덧붙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너의 몸 중의 일부가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이나 발이나 눈을 자르고 빼버리라는 명령을 직접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걸려 넘어지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고대 근동지방에서 살던 셈족 특유의 과장법을 통해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볼 수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과 같이 배타적인 마음을 갖고 자신들의 정당한 이유를 들어 서로를 구분하고 배척하며 죄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을 볼 때, 우리 마음의 상태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어떠한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부님 9일기도 셋째 날 주제 또한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입니다. 회개생활을 시작하는 우리의 마음이 자주 흩어지고 분열되어 서로가 서로를 진실되이 바라보지 못하고 죄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 ‘죄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어떠한 신앙의 태도로 나아가야 하는지 마음을 다해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주님의 영’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중요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민수기에서 모세는 혼자서 온 백성을 돌보고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원로들 중에서 70명을 불러 모아 천막 주위에 세우는데, 그 때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있는 영을 조금씩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런데 뽑힌 이들 가운데 두 사람(엘닷, 메닷)은 천막 주위로 나오지 않고 진영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영이 그들에게도 내려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알리며 그들을 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당신이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거저 주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는 성령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프란치스칸 신학자 Lopez는 인준 받은 회칙 제10장을 전체 회칙의 “신학적 중심점”으로 보고 있으며, 지속적인 개혁과 쇄신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을 지니다”라는 표현은 프란치스칸 삶의 종합적인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에 대한 완성은 성령 안에서 우리와 통교하시며, 성부와 성자의 일치에 이르는 데 있다(요한 17장 참조)라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무엇보다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로 이것을 얻도록 힘쓰십시오: 즉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주님께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도록...” (Rb 10,8)
성인의 전기 작가 첼라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심의 토대 위에 사랑의 고귀한 조직체가 형성되었고,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살아 있는 돌들이 세워져서 성령의 거처가 되었다...(1Cel 38)
이 밖에도 많은 부분을 통해서 사부님이 주님의 영에 얼마나 강조점을 두고 계시는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직접적으로 따르기를 원했지만, 출발점은 언제나 주님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위 할 때는 나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 되어 ‘죄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권고 2에서 사부님은 죄의 근원이 바로 소유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근원인 소유하는 마음은 제2독서에 나오는 야고보서를 통해 잘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 먹었습니다 ···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죄의 근원인 소유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성령을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죄를 물리치고 유혹을 이겨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성령을 바라보는 일이며, 성령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권고 27(‘악습을 몰아내는 덕행’) 5절에서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령과의 일치를 통해 죄에 물들지 않고 분열에서 일치에로 나아간 상태가 바로 오늘 제2독서 말미에 나오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먼저 오늘 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1) 요한과 제자들이 예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을 막아야 하는가 아니면 막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계십니다.
사도들은 이 질문과 함께 자신들이 내린 결론으로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들을 막았습니다. 특별히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일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의 문제는 몹시 미묘한 내용이었으며 다양한 해결책도 함께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그들의 행실로 판단하자’고 했고, 요한은 ‘예수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느냐의 여부로 판단하자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 사람의 자질과 신앙의 정도를 떠나서 교회 울타리 밖의 사람일지라도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말하려고 하는 바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짓게 하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말은 오늘 복음 가운데서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43절부터 마지막까지 나오는 내용 또한 타인을 죄짓게 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죄에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며 덧붙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너의 몸 중의 일부가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이나 발이나 눈을 자르고 빼버리라는 명령을 직접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걸려 넘어지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고대 근동지방에서 살던 셈족 특유의 과장법을 통해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볼 수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과 같이 배타적인 마음을 갖고 자신들의 정당한 이유를 들어 서로를 구분하고 배척하며 죄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을 볼 때, 우리 마음의 상태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어떠한 태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부님 9일기도 셋째 날 주제 또한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입니다. 회개생활을 시작하는 우리의 마음이 자주 흩어지고 분열되어 서로가 서로를 진실되이 바라보지 못하고 죄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을 바라볼 때, ‘죄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어떠한 신앙의 태도로 나아가야 하는지 마음을 다해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주님의 영’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중요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민수기에서 모세는 혼자서 온 백성을 돌보고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원로들 중에서 70명을 불러 모아 천막 주위에 세우는데, 그 때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있는 영을 조금씩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런데 뽑힌 이들 가운데 두 사람(엘닷, 메닷)은 천막 주위로 나오지 않고 진영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영이 그들에게도 내려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알리며 그들을 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당신이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거저 주신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는 성령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프란치스칸 신학자 Lopez는 인준 받은 회칙 제10장을 전체 회칙의 “신학적 중심점”으로 보고 있으며, 지속적인 개혁과 쇄신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을 지니다”라는 표현은 프란치스칸 삶의 종합적인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에 대한 완성은 성령 안에서 우리와 통교하시며, 성부와 성자의 일치에 이르는 데 있다(요한 17장 참조)라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무엇보다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로 이것을 얻도록 힘쓰십시오: 즉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주님께 깨끗한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고 박해와 병고에 겸허하도록...” (Rb 10,8)
성인의 전기 작가 첼라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심의 토대 위에 사랑의 고귀한 조직체가 형성되었고,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살아 있는 돌들이 세워져서 성령의 거처가 되었다...(1Cel 38)
이 밖에도 많은 부분을 통해서 사부님이 주님의 영에 얼마나 강조점을 두고 계시는지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직접적으로 따르기를 원했지만, 출발점은 언제나 주님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위 할 때는 나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 되어 ‘죄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권고 2에서 사부님은 죄의 근원이 바로 소유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근원인 소유하는 마음은 제2독서에 나오는 야고보서를 통해 잘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 먹었습니다 ···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죄의 근원인 소유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성령을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죄를 물리치고 유혹을 이겨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마음 안에 계시는 성령을 바라보는 일이며, 성령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권고 27(‘악습을 몰아내는 덕행’) 5절에서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령과의 일치를 통해 죄에 물들지 않고 분열에서 일치에로 나아간 상태가 바로 오늘 제2독서 말미에 나오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