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녀 데레사의 축일입니다.
성인들 중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파두아의 성 안또니오와 함께
가장 사랑 받는 성인이십니다.
왜 사랑을 받으실까요?
여러 면에서 얘기할 수 있지만
오늘은 아기 예수의 성녀이시기에 사랑 받으심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오늘 독서 중에 두 번째 독서는 동정녀로서
오롯이 주님을 사랑함에 대해 얘기합니다.
이에 비해 첫 번째 독서와 복음은
아기, 어린이의 사랑 받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데레사가 저에게는
남성과 여성으로서 性이 다른 같은 영혼,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갈멜 수도회로서 會가 다른 같은 영혼입니다.
어떤 면에서 같습니까?
작음이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살았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산 것은 같지만
어떻게 사랑을 살았는지는 두 성인이 조금 다릅니다.
두 분 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그래서 많이 사랑했지만
프란치스코가 남자이기에 자기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그것도 대단한 사랑을 하려 하였다면
데레사는 주님께서 더 많이 사랑하시도록 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얘기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데레사입니다.
다시 감히 얘기하지만
하느님을 가장 행복하게 해드린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데레사입니다.
사랑은 어른보다 아기가 많이 받습니다.
행복은 사랑을 받는 이보다 하는 이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가장 행복하시고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사랑을 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기는
하느님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어린이도 그러하지만 아이가 어린이보다 더 사랑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더 행복하게 합니다.
얼마 전 저의 누이 둘과 어디를 갔습니다.
둘 다 손자가 있습니다.
만나서 저와 간단한 인사를 한 다음 바로 손자들 얘기에 하는데
손자 없는 저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동생인 저를 무척 사랑하지만 손자 얘기가 나오니
저는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목적지까지 즐겁게 손자 얘기하도록 봉사하는
운전 기사에 저는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저를 무시하며 얘기해도 그 얘기를 끊을 수 없었던 것은
손자 얘기를 할 때 저의 누나들이 너무도 행복해 했기 때문입니다.
맘껏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
그러므로 아이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데레사는 이런 아기였고
그래서 자기를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도 그러하기를 바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아기처럼 나의 사랑을 받아다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한 없이 사랑하길 원하는 나의 사랑을
아기처럼 잘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십니다.
성인들 중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파두아의 성 안또니오와 함께
가장 사랑 받는 성인이십니다.
왜 사랑을 받으실까요?
여러 면에서 얘기할 수 있지만
오늘은 아기 예수의 성녀이시기에 사랑 받으심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오늘 독서 중에 두 번째 독서는 동정녀로서
오롯이 주님을 사랑함에 대해 얘기합니다.
이에 비해 첫 번째 독서와 복음은
아기, 어린이의 사랑 받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데레사가 저에게는
남성과 여성으로서 性이 다른 같은 영혼,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갈멜 수도회로서 會가 다른 같은 영혼입니다.
어떤 면에서 같습니까?
작음이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살았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산 것은 같지만
어떻게 사랑을 살았는지는 두 성인이 조금 다릅니다.
두 분 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그래서 많이 사랑했지만
프란치스코가 남자이기에 자기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그것도 대단한 사랑을 하려 하였다면
데레사는 주님께서 더 많이 사랑하시도록 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얘기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데레사입니다.
다시 감히 얘기하지만
하느님을 가장 행복하게 해드린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데레사입니다.
사랑은 어른보다 아기가 많이 받습니다.
행복은 사랑을 받는 이보다 하는 이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가장 행복하시고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사랑을 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기는
하느님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어린이도 그러하지만 아이가 어린이보다 더 사랑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더 행복하게 합니다.
얼마 전 저의 누이 둘과 어디를 갔습니다.
둘 다 손자가 있습니다.
만나서 저와 간단한 인사를 한 다음 바로 손자들 얘기에 하는데
손자 없는 저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동생인 저를 무척 사랑하지만 손자 얘기가 나오니
저는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목적지까지 즐겁게 손자 얘기하도록 봉사하는
운전 기사에 저는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저를 무시하며 얘기해도 그 얘기를 끊을 수 없었던 것은
손자 얘기를 할 때 저의 누나들이 너무도 행복해 했기 때문입니다.
맘껏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
그러므로 아이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데레사는 이런 아기였고
그래서 자기를 아기 예수의 데레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도 그러하기를 바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아기처럼 나의 사랑을 받아다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한 없이 사랑하길 원하는 나의 사랑을
아기처럼 잘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십니다.
이제 부터 라도...
결국 행복은 나를 사랑 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내 안에 머무신 다는 것을 알고 깨닫는 것 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내어 주는 사랑인 까닭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고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연인인
우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도 납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는 사랑받는 존재임을 잊어버리고
사랑에 굶주림으로써 사랑받으려고만 하는 불행한 현실이 되었고
급기야는 사랑함으로서 사랑받는다는 역설적인 처방을
내어 놓지 않을 수 없었음을 생각해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아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 사랑받는 사랑임을 경험한 사람일 겁니다.
오늘의 나눔 말씀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싶습니다.
받는 사람의 소명이 없다면 주는 사람이 무슨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도 궁핍해서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도움을 준다는 유치한 우월감이 아니라 받는 자의 소명이 있기에
줄 수 있고 주어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함을 강하게 느끼는 순간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아기처럼 나의 사랑을 받아다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한 없이
사랑하길 원하는 나의 사랑을
아기처럼 잘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사는 하루가 되도록 마음을 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인터넷 상황이 daum이 잘 열리지않네요..
데레사성녀 묵상나눔..감동이예요.
10월의 첫날 주시는 사랑의 선물..감사합니다.
주님의 한없는 기쁨이 되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아나네요..저도 꼭~그렇게 살아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