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주님께서는 오늘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오늘은 기도를 하되 끈질기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들어주시지만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는 것은 우리 편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끈질기게 기도하지 못하는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끈질기게 기도하지 못하는가?
두 가지의 경웁니다.
하나는 절실하지가 않아서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좋으심을 확고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절실하지가 않으면
안 들어주셔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기본으로 깔려있기에
사실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청하지 않습니다.
한 번 툭 던져봐서 ‘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런 태도의 사람에게 기도를 들어주심은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이 은총을 허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은총이 허비되는 것은 하느님으로서도 마음 아프시지만
무엇보다 인간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베푸시는 것이 사람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도록
우리의 갈망을 키우시고 간절히 그리고 정성껏 기도하게 하십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좋으심을 확고히 믿지 못하면
한두 번 기도해보곤 ‘역시 안 들어주시는구먼!’ 하고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선하심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이 선하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하지 않다면 악마이지 그게 무슨 하느님이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라면 선하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가능합니다.
하느님이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믿지만
자기에게 좋으신 하느님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일생에 한 번도 좋으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하느님은 좋은 분이시지만 나와는 상관없고
좋은 분으로 어디에 처박혀 계시는 하느님이시거나
다른 사람에게만 좋은 분이신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었던 좋은 일은 보지 못하고
자기에게 있었던 불행한 일만을 봅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는 좋은 일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좋은 일만 봅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참으로 딱합니다.
왜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나쁜 것만 봅니까?
왜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남의 좋은 것만 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그것도 크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좋은 일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눈에 띄지 않지만
싫은 것은 좋은 것만 있기를 바라기에 특별히 의식이 되고
그런 기억만 남을 것이고
일상의 소소한 좋은 일은 눈에 차지 않고
자기에게 과한 욕심을 부리며 거기에 미달하는 악만을
보고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사람의 문제는
자기가 보기에 나쁜 일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선한 의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기에 자기에게 나쁜 일이
사실은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에 주신 것임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실상 이런 깨달음과 믿음은 쉽지 않은 것이고
인생의 많은 경험을 통해서
힘들게 그리고 드물게 주어지는 은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기도를 하되 끈질기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들어주시지만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는 것은 우리 편의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끈질기게 기도하지 못하는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끈질기게 기도하지 못하는가?
두 가지의 경웁니다.
하나는 절실하지가 않아서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좋으심을 확고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절실하지가 않으면
안 들어주셔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기본으로 깔려있기에
사실 열심히 그리고 간절히 청하지 않습니다.
한 번 툭 던져봐서 ‘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런 태도의 사람에게 기도를 들어주심은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과 같이 은총을 허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은총이 허비되는 것은 하느님으로서도 마음 아프시지만
무엇보다 인간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베푸시는 것이 사람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도록
우리의 갈망을 키우시고 간절히 그리고 정성껏 기도하게 하십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좋으심을 확고히 믿지 못하면
한두 번 기도해보곤 ‘역시 안 들어주시는구먼!’ 하고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선하심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이 선하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하지 않다면 악마이지 그게 무슨 하느님이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라면 선하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가능합니다.
하느님이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믿지만
자기에게 좋으신 하느님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일생에 한 번도 좋으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면
하느님은 좋은 분이시지만 나와는 상관없고
좋은 분으로 어디에 처박혀 계시는 하느님이시거나
다른 사람에게만 좋은 분이신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었던 좋은 일은 보지 못하고
자기에게 있었던 불행한 일만을 봅니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는 좋은 일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있는 좋은 일만 봅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참으로 딱합니다.
왜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나쁜 것만 봅니까?
왜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은 보지 못하고 남의 좋은 것만 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고
그것도 크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좋은 일은 당연하기에 특별히 눈에 띄지 않지만
싫은 것은 좋은 것만 있기를 바라기에 특별히 의식이 되고
그런 기억만 남을 것이고
일상의 소소한 좋은 일은 눈에 차지 않고
자기에게 과한 욕심을 부리며 거기에 미달하는 악만을
보고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사람의 문제는
자기가 보기에 나쁜 일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선한 의지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기에 자기에게 나쁜 일이
사실은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이기에 주신 것임을
깨닫지도 믿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실상 이런 깨달음과 믿음은 쉽지 않은 것이고
인생의 많은 경험을 통해서
힘들게 그리고 드물게 주어지는 은총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