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가르침 또는 지침을 주신 얘깁니다.
첫 번째 얘기는 주님을 따르는 율법학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율법학자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적대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율법학자들 중 드물게,
아니 어쩌면 유일하게 주님을 따르겠다고 자청을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아주 기특하고도 귀한 성소자가 아닙니까?
이런 그를 그러나 주님께서는 덥석 성소자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듣기에 따라서는 내치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정말 그러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내치신 것이라기보다는 어려움을 각오하라는,
미래에 대한 주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미래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미래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재느라 여간해서는 발걸음을 떼지 못합니다.
길을 떠나지 못하는,
다시 말해서 아예 출발을 못하는 근본적인 결함이 그에게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요즘 현실로 보면 장가도 못가고 수도원도 못갑니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현재를 이어갑니다.
이에 비해 미래를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어떠한 결정을 너무 쉽게 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하려는 사람에게 배우자의 문제점을 얘기하면
‘단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얘기하면 ‘어려움이 없는 것이 어디 있나요?’
뭐 이런 식으로 받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덜컥 결혼을 하지만
막상 어려운 현실에 부딪치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럴 수 있지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낭만이 아니라 진정한 열망이 되려면
어려움을 충분히 알고 각오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이미 주님을 따르는 제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청을 하는 거지요.
그런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고 하십니다.
정말 그러셨을까요?
정말 그러셨다면 그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과거 뒤치다꺼리를 하기보다 미래를 적극적으로 살라는 뜻일까요?
그런 뜻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지나간 일 때문에 미래를 적극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거나
미래를 망치는 경우가 우리에게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장례는 사실 그 어떤 미래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아버지 장례는 그 어떤 중요한 일도 다 미루거나 포기하고
인간이 해야 할 일이고 도리입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니
주님을 따름은 그 아버지 장례보다도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제자는 “먼저”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하지만
주님은 “먼저”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정말 겁나고 엄청난 결단을 요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침 또는 지침을 주신 얘깁니다.
첫 번째 얘기는 주님을 따르는 율법학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율법학자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적대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율법학자들 중 드물게,
아니 어쩌면 유일하게 주님을 따르겠다고 자청을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아주 기특하고도 귀한 성소자가 아닙니까?
이런 그를 그러나 주님께서는 덥석 성소자로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듣기에 따라서는 내치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정말 그러셨을까요?
제 생각에는 내치신 것이라기보다는 어려움을 각오하라는,
미래에 대한 주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미래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미래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재느라 여간해서는 발걸음을 떼지 못합니다.
길을 떠나지 못하는,
다시 말해서 아예 출발을 못하는 근본적인 결함이 그에게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요즘 현실로 보면 장가도 못가고 수도원도 못갑니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현재를 이어갑니다.
이에 비해 미래를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어떠한 결정을 너무 쉽게 내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하려는 사람에게 배우자의 문제점을 얘기하면
‘단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얘기하면 ‘어려움이 없는 것이 어디 있나요?’
뭐 이런 식으로 받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덜컥 결혼을 하지만
막상 어려운 현실에 부딪치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럴 수 있지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 낭만이 아니라 진정한 열망이 되려면
어려움을 충분히 알고 각오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이미 주님을 따르는 제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청을 하는 거지요.
그런 그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고 하십니다.
정말 그러셨을까요?
정말 그러셨다면 그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과거 뒤치다꺼리를 하기보다 미래를 적극적으로 살라는 뜻일까요?
그런 뜻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지나간 일 때문에 미래를 적극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거나
미래를 망치는 경우가 우리에게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장례는 사실 그 어떤 미래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아버지 장례는 그 어떤 중요한 일도 다 미루거나 포기하고
인간이 해야 할 일이고 도리입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니
주님을 따름은 그 아버지 장례보다도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제자는 “먼저”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하지만
주님은 “먼저”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정말 겁나고 엄청난 결단을 요하는 일입니다.
소경된자 다윗의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말씀과함께 오늘 아침 다윗"나는 발길 닿는 대로 가야 할 처지오"
고개를 오르며 우는다윗 여러가지상황을 보며
주님의 눈에 들면 사랑과평화 자체이신 주님 먼저 당신을 따르게하시고
따라야만되는 운명 감사드리며
2주간 저 자신 부터 잘 지내고
신부님(요한1;2)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영혼이 평안 하듯이
그대가 모든면에서 평안하고 또 건강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