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계속 바리사이들과 상대하십니다.
어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가지 말고
헤로데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라는 바리사이의 얘기였다면
오늘은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의 얘기입니다.
어제 바리사이에 대해서 제가 안 좋은 쪽으로 얘기를 하였는데
어제 하루 종일 그 바리사이에게 미안했습니다.
바리사이에 대한 나의 편견이 아닐까?
바리사이가 정말 좋은 뜻으로
예수님에게 다른 곳으로 떠나라 얘기했을 수도 있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지도자 집에 가시어 식사를 하십니다.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이고,
사랑과 존경까지는 아니라도 호의의 표시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 같으면 그 사람의 사랑과 호의를 생각해서
그가 꺼리는 일, 즉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은 삼갔을 것입니다.
남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하면 초대에 고마워하며
먹는 동안 즐거운 얘기, 덕담이나 하는 것이 도리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뜬금없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물으시고는
너무 도발적인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니 병을 고쳐주십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은 참 도전적이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규율과 계율도 거침없이 깨는 분이십니다.
오직 사랑만이 중요하니 단순 무식하십니다.
사랑이면 누가 뭐라 해도 하고 사랑 아니면 안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적지 아니 당황하게 하고 혼란스럽게도 하십니다.
옛날에 걸레 스님, 중광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달마도로 유명한 화가 스님이었지만 괴짜 스님,
자유분방하고 파계를 밥 먹듯이 하는 스님으로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분이고
결국 불교계로부터 파문을 받은 분입니다.
그런 스님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곱추 여자가 앉았습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이 여자가 평생 남자 품에 안겨본 적이 없는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밤으로 육보시를 해주었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20대 때 이 얘기를 듣고 참 멋있다는 생각과
괜히 도사인 척 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같이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당시 이 정도의 파문을 일으키신 분이고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도발적이었던 분이셨고
끊임없이 사랑의 도전을 하는 분이셨습니다.
오늘도 저에게 단순 무식하게 사랑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어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가지 말고
헤로데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라는 바리사이의 얘기였다면
오늘은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의 얘기입니다.
어제 바리사이에 대해서 제가 안 좋은 쪽으로 얘기를 하였는데
어제 하루 종일 그 바리사이에게 미안했습니다.
바리사이에 대한 나의 편견이 아닐까?
바리사이가 정말 좋은 뜻으로
예수님에게 다른 곳으로 떠나라 얘기했을 수도 있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지도자 집에 가시어 식사를 하십니다.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이고,
사랑과 존경까지는 아니라도 호의의 표시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 같으면 그 사람의 사랑과 호의를 생각해서
그가 꺼리는 일, 즉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은 삼갔을 것입니다.
남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하면 초대에 고마워하며
먹는 동안 즐거운 얘기, 덕담이나 하는 것이 도리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뜬금없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물으시고는
너무 도발적인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니 병을 고쳐주십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예수님은 참 도전적이고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남의 눈치를 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규율과 계율도 거침없이 깨는 분이십니다.
오직 사랑만이 중요하니 단순 무식하십니다.
사랑이면 누가 뭐라 해도 하고 사랑 아니면 안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적지 아니 당황하게 하고 혼란스럽게도 하십니다.
옛날에 걸레 스님, 중광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달마도로 유명한 화가 스님이었지만 괴짜 스님,
자유분방하고 파계를 밥 먹듯이 하는 스님으로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분이고
결국 불교계로부터 파문을 받은 분입니다.
그런 스님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곱추 여자가 앉았습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 이 여자가 평생 남자 품에 안겨본 적이 없는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그 밤으로 육보시를 해주었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20대 때 이 얘기를 듣고 참 멋있다는 생각과
괜히 도사인 척 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이 같이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당시 이 정도의 파문을 일으키신 분이고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도발적이었던 분이셨고
끊임없이 사랑의 도전을 하는 분이셨습니다.
오늘도 저에게 단순 무식하게 사랑하라고 도전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입니다.
매일 매일
그 사랑에 취해 봅니다.
나와는 무관한 어떤 사람에 대해
동료가 비난하고 있을 때 부화내동 않고
바른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더군요.
상대가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는다고 하면 다행이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와의 관계가 깨질 수도 있음을,
더구나 그가 나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일 때는
더 더욱 용기가 필요하더군요.
목소리는 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영혼)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목소리를 알아듣고 상대가 누구인가를 아는 만남은 육적인 만남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중광스님이 옆에 않은 꼽추가 불쌍한 여자였기에 육보시를 했다는 말,
물론 겉과 속이 다 아름다워야 하겠지만,
마음을 닦는 도인의 발상은 아닌 듯 싶은 것은
외모에 열등감을 갖고 있는 저의 자격지심일까요?
부디, 저도 단순 무식하게 사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