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역 프란치스칸 모든 가족은
프란치스코 회칙 인준 800 주년을 기념하여
11월 한 달, 매주 금요일을 프란치스코 요일로 정하고
말씀의 전례 안에서 프란치스코 영화를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는데,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가
폐허가 된 산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하는 장면입니다.
쓰레기와 먼지에 파 묻혀 있던 십자가를 발견하고는
십자가에 덮여 있는 먼지를 털어내자 주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폐허가 되었어도 주님은 거기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성당을 수리하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프란치스코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도 주님을 발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님을 보지 못하기에 그 성당에서 떠났고
그래서 성당을 폐허로 만들었지만
프란치스코는 그 폐허에서도 주님을 발견하고는
쓰레기 하치장을 다시 성당으로 바꿉니다.
여기서 저는 몇 가지 성찰을 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하고 고린토 서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비록 온갖 쓰레기로 가득하다 해도,
그래도 나는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자의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자의식을 버리는 순간,
나는 성전이 아니라 쓰레기장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나는 쓰레기를 안고 사는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며칠 전, 미사를 드릴 때 심사가 편치 않았습니다.
전날 들은 얘기가 계속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미사 중에 그까짓 하찮고 부정적인 상념이
하느님 대신 저를 계속 차지하고 있음을 자각하고는
이럴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러니 신통하게도 그렇게 저를 어지럽게 하던 상념이 사라지고
내적 평화가 다시 왔습니다.
이렇게 제 안에 주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과 같이
이제는 우리 공동체 안에 주님의 성전을 재건해야 합니다.
원리는 똑같습니다.
저희 회헌을 보면
공동체는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장소라고 얘기합니다.
비록 저를 비롯하여 형제들이 프란치스칸 이상에 훨씬 못 미치고
매우 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우리는 실망하거나
여기서 주님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망과 포기는 악마가 가장 노리는 것이지요.
많은 경우 실망은 사랑이 없는 교만한 욕심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공동체와 형제를 사랑한다면
실망이란 없고 포기란 더 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미워하고 실망하고 포기하는 순간 하느님은
우리 사이에서 자취를 감추시고,
반대로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그 보잘 것 없는 형제와 공동체를
사랑하는 그 순간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하느님이 아니 계시면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니 사랑을 하면 거기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거룩하다는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사랑의 하느님이 거기 아니 계시고
따라서 주님의 성전이 아닙니다.
반대로 죄 많고 허물투성이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그 죄와 허물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 하느님은 계시고
그 공동체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회칙 인준 800 주년을 기념하여
11월 한 달, 매주 금요일을 프란치스코 요일로 정하고
말씀의 전례 안에서 프란치스코 영화를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 처음으로 영화를 보았는데,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가
폐허가 된 산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하는 장면입니다.
쓰레기와 먼지에 파 묻혀 있던 십자가를 발견하고는
십자가에 덮여 있는 먼지를 털어내자 주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폐허가 되었어도 주님은 거기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치스코는 성당을 수리하고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프란치스코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도 주님을 발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님을 보지 못하기에 그 성당에서 떠났고
그래서 성당을 폐허로 만들었지만
프란치스코는 그 폐허에서도 주님을 발견하고는
쓰레기 하치장을 다시 성당으로 바꿉니다.
여기서 저는 몇 가지 성찰을 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하고 고린토 서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비록 온갖 쓰레기로 가득하다 해도,
그래도 나는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자의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자의식을 버리는 순간,
나는 성전이 아니라 쓰레기장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나는 쓰레기를 안고 사는 비참한 인생이 됩니다.
며칠 전, 미사를 드릴 때 심사가 편치 않았습니다.
전날 들은 얘기가 계속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미사 중에 그까짓 하찮고 부정적인 상념이
하느님 대신 저를 계속 차지하고 있음을 자각하고는
이럴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러니 신통하게도 그렇게 저를 어지럽게 하던 상념이 사라지고
내적 평화가 다시 왔습니다.
이렇게 제 안에 주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과 같이
이제는 우리 공동체 안에 주님의 성전을 재건해야 합니다.
원리는 똑같습니다.
저희 회헌을 보면
공동체는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장소라고 얘기합니다.
비록 저를 비롯하여 형제들이 프란치스칸 이상에 훨씬 못 미치고
매우 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우리는 실망하거나
여기서 주님을 만나는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망과 포기는 악마가 가장 노리는 것이지요.
많은 경우 실망은 사랑이 없는 교만한 욕심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공동체와 형제를 사랑한다면
실망이란 없고 포기란 더 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미워하고 실망하고 포기하는 순간 하느님은
우리 사이에서 자취를 감추시고,
반대로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그 보잘 것 없는 형제와 공동체를
사랑하는 그 순간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성전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하느님이 아니 계시면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니 사랑을 하면 거기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거룩하다는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사랑의 하느님이 거기 아니 계시고
따라서 주님의 성전이 아닙니다.
반대로 죄 많고 허물투성이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그 죄와 허물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 하느님은 계시고
그 공동체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사랑의 하느님이 거기 아니 계시고.."
주신 말씀 감사 드립니다.
어느 꼬마가 매일 잠깐 성체 조배하는 것을
신부님께서 보시고는 꼬마에게 너는 조배을 매일 하는데
하느님을 만나 뵙기나 하니 !!!
그럼요 !!
어려운 친구 학용품도 주고,엄마 심부름도 하면서
그러니까 사랑을 하며는 하느님을 만날 수가 있어요.
신부님께서 그러셨잖아요!!!
하느님은 사랑 이라고...
우리 서로서로 사랑하면 거기에 하느님께서 웃고 계실 꺼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