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아주 멋진 말입니다.
얼마 전, 저는 새로운 책임자에게 프란치스코 영성학교 강의를
그만 두겠다는 뜻을 전하였습니다.
매주 강의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전부터 제가 영성학교에서 강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영성이나 글라라 영성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공하지 않았지만 전공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전공하지 않았지만 제가 강의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학문적인 강의는 제가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주장을 하지 객관적인 주장은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정 강의는 할 수 있어도
학문적인 강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만 두겠다고 한 더 큰 이유는
영성학교 책임자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새로운 책임자에 대한 안 좋은 감정 때문은 아닙니다.
새로운 책임자가 새로운 학교를 만들고
새로운 강의와 학사 계획을 짜는데 있어 제가 부담되지 않기 위해서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처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에는
새로운 제도와 조직에는 물갈이가 필요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는
이처럼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물갈이하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새 부대는
기존의 부대를 대체하는 다른 부대가 아니라
새로워진 부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라!’가 아니라 ‘사람이 바뀌라!’는 얘기지요.
포도주는 새로워졌으니 부대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무엇이 새 포도주입니까?
제 생각에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전과 다른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
복음에서 주님은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전에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제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요약하면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러니 율법에 맞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이제는 사랑에 맞는 사랑 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법의 잣대로 판단하고 단죄하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정신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안고 가는 것입니다.
법의 잣대로 사람을 갈아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정신으로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내 법의 잣대로 사람을 재고
내 법의 잣대에 맞는 사람이기를 요구하고
요구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을 갈아치려 합니다.
그는 저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데
저는 저의 잣대를 그에게 들이댑니다.
“잘못이 아니라 고통을”을 경구삼아
새 해를 시작한지 보름이 지났지만
그래서 아침마다 이 경구를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새 해가 되었다고 새 부대가 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아주 멋진 말입니다.
얼마 전, 저는 새로운 책임자에게 프란치스코 영성학교 강의를
그만 두겠다는 뜻을 전하였습니다.
매주 강의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전부터 제가 영성학교에서 강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프란치스코 영성이나 글라라 영성을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공하지 않았지만 전공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전공하지 않았지만 제가 강의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학문적인 강의는 제가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주장을 하지 객관적인 주장은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피정 강의는 할 수 있어도
학문적인 강의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만 두겠다고 한 더 큰 이유는
영성학교 책임자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새로운 책임자에 대한 안 좋은 감정 때문은 아닙니다.
새로운 책임자가 새로운 학교를 만들고
새로운 강의와 학사 계획을 짜는데 있어 제가 부담되지 않기 위해서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처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에는
새로운 제도와 조직에는 물갈이가 필요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는
이처럼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물갈이하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새 부대는
기존의 부대를 대체하는 다른 부대가 아니라
새로워진 부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라!’가 아니라 ‘사람이 바뀌라!’는 얘기지요.
포도주는 새로워졌으니 부대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무엇이 새 포도주입니까?
제 생각에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전과 다른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
복음에서 주님은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전에는 이렇게 말했지만 이제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요약하면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러니 율법에 맞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이제는 사랑에 맞는 사랑 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법의 잣대로 판단하고 단죄하고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정신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안고 가는 것입니다.
법의 잣대로 사람을 갈아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정신으로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내 법의 잣대로 사람을 재고
내 법의 잣대에 맞는 사람이기를 요구하고
요구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을 갈아치려 합니다.
그는 저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데
저는 저의 잣대를 그에게 들이댑니다.
“잘못이 아니라 고통을”을 경구삼아
새 해를 시작한지 보름이 지났지만
그래서 아침마다 이 경구를 떠올리며 하루를 시작하지만
새 해가 되었다고 새 부대가 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나날이 새롭게 살아가는 마음은
길을 떠난 영혼은 한 곳에 머물지 않기 때문일 것이고
가면을 벗고 원래의 본모습을 찾아가는 회개의 의미일 수도 있다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픔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하면
아픔 없이 가능할까하는 제 자신을 바라보는 아픔이 있네요.
어제는 아들과 이 공 헌 라우렌시오 신부님의 첫 미사를 함께 하고
신부님의 안수도 받고 지하 식당에서 식사 초대도 받는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탐욕도 성냄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그렇게 빈 마음으로 사랑만을 위해 그 길에 들어선 분들,
그 맑고 선한 눈길 주고 받으며 함께 식사하던
그 순간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우연이(세상에 우연은 없지요) 마주 앉아 식사를 하게 된
엠마누엘 수사님의 순하디. 순한 눈망울이 지금도 제 눈에 선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한 힘은 순수함이지 영악함이 아니라는 걸
새롭게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율법은 사랑을 위해서 만 존재 하고
하느님은 사랑 이시기 때문 입니다.
새 포도주는 쓰고, 떫고, 신 맛이 가시지 않은, 미숙한 술이지만
오래된 포도주는 달고, 부드럽고, 향기롭습니다.
묵은 포도주에 맛을 들이면 아무도 새 포도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사역도 다들 오래된 사역을 좋아합니다.
사역의 know-how가 쌓이고, 조직도 잘 갖추어지고,
재정도 풍부하지만, 예수님은 새 포도주의 끓어오르는 젊음 앞에서
낡은 가죽 부대는 터지고 말 것이라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만큼이나 신축성 있는 새 가죽 부대 만이
새 포도주를 감당해 낼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역은 새로운 조직을 요구합니다.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조직,
공동체의 쇄신을 위해 그러한 새로운 조직의 창조를 꿈꾸며
물러설 때를 분별하시는 신부님의 사려깊은 마음을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