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열 두 사도를 뽑으시는 마르코 복음입니다.
열 두 사도를 뽑으시는 얘기는 공관 복음에 모두 나오지만
조금씩 아니 어떻게 보면 많이 다릅니다.
우선 열 두 사도의 이름이 다릅니다.
다른 사람인지 같은 사람이지 모르지만
타대오라는 이름의 사도와 유다라는 이름의 사도가 있습니다.
뽑으시기 전과 뽑으실 때의 주님에 대한 묘사가 다릅니다.
마르코는 그간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뽑으시고
루카는 기도하고 나서 뽑으시는데 비해
마태오 복음은 그냥 열 두 사도를 부르셨다고 평이하게 얘기합니다.
마르코와 루카는 산에 오르시어 뽑으시지만
마태오 복음은 어디서 부르셨는지 언급이 없습니다.
열 두 사도를 부르시고 뽑으심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을 뽑으시는 것이기에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쓰인 마태오 복음이
사도 선발에 더 의미를 두고 정성을 기울여 기술할 것 같은데
오히려 평이하게 기술하는 것이 신기합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사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기술입니다.
이면에서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이 가장 충실합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 사도는
첫 째, 부르심을 받아 주님께 나아가는 존재,
둘 째, 주님과 함께 머무는 존재,
셋 째,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되는 존재입니다.
사도는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께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친구의 부름에 친구에게로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엘리의 부름에 엘리에게로 가는 사무엘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깨어있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듣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다음 주님 곁에 머무는 존재입니다.
곁에 머무는 것은 지나치는 것도 들르는 것이 아닙니다.
볼 일 보러 갔다가 볼 일 보고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치다가 마음에 들면 마음에 드는 그곳에 머물듯이
사랑의 머묾이고 사랑의 나눔입니다.
그래서 곁에 있음이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궁극적으로 파견되는 존재입니다.
아니 파견되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주님께 나아가 머물기만 하면 사도가 아닐 것입니다.
수도생활로 말하면 봉쇄 관상 수도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파견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어떻게 주님 곁에 머물면서 또한 파견됩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파견되는 것이고,
주님께서 계신 곳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당신이 가실 곳에
미리 사도들을 파견하셨다고 전하는데,
이는 오늘도 우리가 파견되는 것이 주님과 헤어짐이 아니고
우리가 파견되는 곳이 주님과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떨어져 갈릴래아 호수 한 가운데서
밤새 혼자 풍랑과 씨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파견되어도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으며
파견되는 곳이 주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말씀이고,
우리가 파견되는 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주님이라는 말씀이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 안에 계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존재,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는 존재,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주님과 함께 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열 두 사도를 뽑으시는 얘기는 공관 복음에 모두 나오지만
조금씩 아니 어떻게 보면 많이 다릅니다.
우선 열 두 사도의 이름이 다릅니다.
다른 사람인지 같은 사람이지 모르지만
타대오라는 이름의 사도와 유다라는 이름의 사도가 있습니다.
뽑으시기 전과 뽑으실 때의 주님에 대한 묘사가 다릅니다.
마르코는 그간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뽑으시고
루카는 기도하고 나서 뽑으시는데 비해
마태오 복음은 그냥 열 두 사도를 부르셨다고 평이하게 얘기합니다.
마르코와 루카는 산에 오르시어 뽑으시지만
마태오 복음은 어디서 부르셨는지 언급이 없습니다.
열 두 사도를 부르시고 뽑으심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을 뽑으시는 것이기에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쓰인 마태오 복음이
사도 선발에 더 의미를 두고 정성을 기울여 기술할 것 같은데
오히려 평이하게 기술하는 것이 신기합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사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기술입니다.
이면에서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이 가장 충실합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 사도는
첫 째, 부르심을 받아 주님께 나아가는 존재,
둘 째, 주님과 함께 머무는 존재,
셋 째,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되는 존재입니다.
사도는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께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친구의 부름에 친구에게로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엘리의 부름에 엘리에게로 가는 사무엘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깨어있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듣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다음 주님 곁에 머무는 존재입니다.
곁에 머무는 것은 지나치는 것도 들르는 것이 아닙니다.
볼 일 보러 갔다가 볼 일 보고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치다가 마음에 들면 마음에 드는 그곳에 머물듯이
사랑의 머묾이고 사랑의 나눔입니다.
그래서 곁에 있음이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궁극적으로 파견되는 존재입니다.
아니 파견되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주님께 나아가 머물기만 하면 사도가 아닐 것입니다.
수도생활로 말하면 봉쇄 관상 수도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파견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어떻게 주님 곁에 머물면서 또한 파견됩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파견되는 것이고,
주님께서 계신 곳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당신이 가실 곳에
미리 사도들을 파견하셨다고 전하는데,
이는 오늘도 우리가 파견되는 것이 주님과 헤어짐이 아니고
우리가 파견되는 곳이 주님과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떨어져 갈릴래아 호수 한 가운데서
밤새 혼자 풍랑과 씨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파견되어도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으며
파견되는 곳이 주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말씀이고,
우리가 파견되는 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주님이라는 말씀이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 안에 계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존재,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는 존재,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주님과 함께 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고,그런 다음 주님 곁에 머물 겠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참사회의 수고 많으셨습니다.
올해도 주님과 함께 모든 일들 순적히 이루어지는
수도회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아침마다 나누어주시는 강론 말씀..늘 감사드립니다.^^
어떤 사한을 놓고 복음정신을 따라야 함과
인간적인 눈으로는 깨진 독에 물 붓는 일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좁은 길을 걷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존재,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는 존재,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주님과 함께 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 님이 나를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님이 부르시니 기뻐 따르오리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몸소 하소서~♪♪“
오늘 아침 직원기도에서 부른 마침 성가처럼
저도 님이 저를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님이 부르시기에 기뻐 따르겠습니다.
제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몸소 하시는 믿음으로..
고맙습니다.
주님 원하시는 곳에
주님과 함께 가는 나를 꿈꾸며 기도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머물기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그 곳에
나의 눈길이 머물기 원해요♪
신부님!
오늘도 主님과 함께 행복한 하루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