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오늘 복음은 악령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아는 존재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는데
이 악령은 한 눈에 예수님의 정체를 압니다.
신통력이 있는 무당이나 점쟁이들도 사람의 정체를 아는데
악령은 그 신통력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의 정체까지 알 정도로 신통력이 뛰어난 존재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기까지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하고 그는 감히 말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까지 하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잘 알고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까지 하지만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하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존재이고,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로 예수님을 여기는 존재입니다.
관계를 맺으려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사랑을 괴롭힘으로 여기는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괴롭힘으로 여기기에 관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느님과의 관계는 거부하고
하느님의 사랑은 괴롭힘으로 여기지만
세상과의 관계에는 집착을 합니다.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러므로 악령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거부하고
이 세상과의 관계는 떠나지 않으려는 존재이고,
자기 영역, 자기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고수하려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악령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잘 압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괴롭힘으로만 느껴집니다.
고통을 통해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너무 밉고 원망스럽습니다.
우리도 내 삶에 안주합니다.
우리도 내 삶의 영역을 떠나려 하지 않고
내 삶의 영역에 누가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 영역에 하느님이 들어오신다 해도 싫습니다.
내 삶의 안락함을 깨는 그 어떤 것도 싫습니다.
사랑이 좋지만 내 삶의 안락함을 깨는 것이라면
사랑도 싫고 귀찮습니다.
그래도
누가 나보고 악령이라고 하면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솔직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함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회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표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 아침,
희망을 가지고 다시 용기를 내어봅니다.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오늘 복음은 악령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아는 존재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는데
이 악령은 한 눈에 예수님의 정체를 압니다.
신통력이 있는 무당이나 점쟁이들도 사람의 정체를 아는데
악령은 그 신통력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의 정체까지 알 정도로 신통력이 뛰어난 존재입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기까지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하고 그는 감히 말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까지 하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잘 알고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까지 하지만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하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존재이고,
자신을 괴롭히는 존재로 예수님을 여기는 존재입니다.
관계를 맺으려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사랑을 괴롭힘으로 여기는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괴롭힘으로 여기기에 관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느님과의 관계는 거부하고
하느님의 사랑은 괴롭힘으로 여기지만
세상과의 관계에는 집착을 합니다.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그러므로 악령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거부하고
이 세상과의 관계는 떠나지 않으려는 존재이고,
자기 영역, 자기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고수하려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악령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잘 압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괴롭힘으로만 느껴집니다.
고통을 통해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너무 밉고 원망스럽습니다.
우리도 내 삶에 안주합니다.
우리도 내 삶의 영역을 떠나려 하지 않고
내 삶의 영역에 누가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내 영역에 하느님이 들어오신다 해도 싫습니다.
내 삶의 안락함을 깨는 그 어떤 것도 싫습니다.
사랑이 좋지만 내 삶의 안락함을 깨는 것이라면
사랑도 싫고 귀찮습니다.
그래도
누가 나보고 악령이라고 하면 싫어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솔직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함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회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표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 아침,
희망을 가지고 다시 용기를 내어봅니다.
사실 제 자신을 보더라도 몰라서 못하는 것 보다는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알면서 실천 하지 않을 때 죄가 된다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요즘 제 영혼의 상태가 지옥이고
마음이 지옥을 헤매고 있으니 댓글이 안 되네요.
묵상 글을 쓰려면 저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저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싶어서지요.
궁지에 몰려도 감성과 이성의 조화와 균형을 갖고
자신을 객관화 시키며 글을 쓸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짙게 드는 아침입니다.
희망을 가지고 다시 용기를 내어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