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시다시피 열두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인 분이 바로
바오로 사도와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바르나바 사도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두 분이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도 못지않게
교회를 세우고 받치는 기둥이었다고 우리 교회가 인정하기 때문이지요.
바르나바는 우선 교회가 그리스도교라고 불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교의 한 지파이거나 유대교의 이단 정도로 여겨지던 교회가 이제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교회로 인정받기 시작한 거지요.
그래서 저는 불리는 것의 중요함을 오늘 생각해봅니다.
자기가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불리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냐 하면 자기 스스로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인정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우리 교회가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된 것인데
바르나바가 어찌 했기에 이렇게 인정을 받게 된 걸까요?
우선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바르나바가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바르나바를 우선 착한 사람이라고 하고
덧붙여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착함이
그의 인성이라면 성령과 믿음의 충만함은 그의 영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착한 인성이 바탕이 되었기에
그가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우리 교회도 좋은 평판과 함께
그리스도교라고 불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나 우리 주변을 보나
인성이 바탕이 되지 않고 신앙에 열심한 사람이 있는데
이럴 때 그들의 영성이란 괴팍하게 보일 뿐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가 좋은 평판을 얻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지 않지요.
제가 너무 비하적으로 또는 너무 자학적으로 저를 보는 것인지 모르지만
저는 저로 인해 세례를 받은 사람이 극히 적고,
저로 인해 수도원 들어온 사람이 없다는 것에 열등감이 있고 부끄러운데
이것이 저의 신앙적인 열성 이전에 인성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저를 '마당쇠'라고 불렀는데
저 스스로는 저를 주님의 마당쇠라고 하고
주님의 마당쇠가 되겠다고 하지만 명실상부하지 않습니다.
과거 형제들을 양성할 때 얼마나 많이 도끼눈을 떴으면 형제들이 저를
'도끼눈'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이것이 명실상부 진짜 제 이름인 것이고,
이런 저이기에 복음 선포가 시작부터 벽에 부딪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의 육신의 형제들이 자주 저에게 충고하기를
자주 웃어주고, 자주 손을 잡아주라고 하는데
이런 것부터 못하며 복음 선포가 되길 바라면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위로의 아들'이라 불린 바르나바를 오늘 무척 부러운데,
이렇게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닮으려 노력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영혼의 위로)
http://www.ofmkorea.org/227267
18년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참으로 착한 사람은?)
http://www.ofmkorea.org/125873
15년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착한 것만으로는 안 된다)
http://www.ofmkorea.org/78840
13년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싫어도 좋다고 하는 것)
http://www.ofmkorea.org/54148
12년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착함만으로는 부족하다)
http://www.ofmkorea.org/5917
11년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참 사랑은....)
http://www.ofmkorea.org/5137
09년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누가 먼저 줄까?)
http://www.ofmkorea.org/2649
08년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http://www.ofmkorea.org/1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