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대조가 있습니다.
예레미아서에서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이와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의 대조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이는 당연히 하느님께 떠나 있어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사막의 덤불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 하느님을 의지하는 이는 하느님의 복을 받아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막의 덤불과 물가에 심긴 나무.
얼마나 극명한 대조입니까?
이렇게 극명하게 대조되는 인생임을 알면서도
사막의 덤불이 되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막의 덤불이 되어본 사람,
영적인 사막의 그 쓰디씀과 메마름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어떤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대조입니다.
잘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던 부자와
가난한데다 종기투성이로 하루 살기가 괴롭기만 했던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는 그야말로 인생 역전이 됩니다.
부자는 저승의 불길 속에서
라자로가 손가락으로 찍어주는 물 한 방울을 애타하는 처지가 되었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에서 위로를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역전이 되었습니까?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루카의 관점이 다분히 배어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는 것과 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다른 어느 복음보다 루카 복음에서 더 강합니다.
루카복음에서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표면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부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았기에 저승에서 고초를 받고
라자로는 이 세상에서 나쁜 것을 받았기에 위로를 받는다지만
속 내용은 무관심과 단절이 인생 역전의 이유입니다.
첫 번째 무관심과 단절은 하느님과의 단절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쉬움 없었기에 하느님 나라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저승에서 천상의 물 한 방울에 갈증을 느끼듯
이 세상에서 천상의 물을 갈망했다면
하느님 나라와 그렇게 담 쌓고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 무관심과 단절은 라자로와의 단절입니다.
아니 라자로로 대표되는 문 밖 세상과의 단절입니다.
이 세상에서 라자로는 부자의 문간밖에 살고 있었습니다.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라자로가 간절히 바랐다는 것은 부자가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부자가 잘 주었다면 간절히 바랄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겠지요.
라자로의 가난은 부자가 주지 않은 결과로서의 가난입니다.
우리는 깊은 숙고 없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이 그의 운명이거나
그가 벌지 않아서 가난하거나 능력이 없어서 가난한,
그야 말로 나와는 상관없는 그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 가난은 우리가 주지 않아서 가난한 것입니다.
내 집 안에서 나의 가족과 아무 부족함 없이 즐겁고 행복하기에
나는 내 문 밖의 존재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이 단절이
누구도 건널 수 없는 저승과 천국의 단절이 되고
이 세상에서 라자로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은 부자는
저승에서 물 한 방울조차 받을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저승에 간 이유는 부자였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줄 수 있었음에도 주지 않았던 그 이유가 제일 큰 이유였습니다.
이 사순절, 우리의 사랑 실천에 대해 돌아봅니다.
예레미아서에서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이와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의 대조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이는 당연히 하느님께 떠나 있어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사막의 덤불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 하느님을 의지하는 이는 하느님의 복을 받아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막의 덤불과 물가에 심긴 나무.
얼마나 극명한 대조입니까?
이렇게 극명하게 대조되는 인생임을 알면서도
사막의 덤불이 되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막의 덤불이 되어본 사람,
영적인 사막의 그 쓰디씀과 메마름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어떤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대조입니다.
잘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던 부자와
가난한데다 종기투성이로 하루 살기가 괴롭기만 했던 라자로가
죽은 다음에는 그야말로 인생 역전이 됩니다.
부자는 저승의 불길 속에서
라자로가 손가락으로 찍어주는 물 한 방울을 애타하는 처지가 되었고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에서 위로를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역전이 되었습니까?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이 이야기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루카의 관점이 다분히 배어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는 것과 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다른 어느 복음보다 루카 복음에서 더 강합니다.
루카복음에서 아브라함의 입을 빌어 표면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부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았기에 저승에서 고초를 받고
라자로는 이 세상에서 나쁜 것을 받았기에 위로를 받는다지만
속 내용은 무관심과 단절이 인생 역전의 이유입니다.
첫 번째 무관심과 단절은 하느님과의 단절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쉬움 없었기에 하느님 나라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저승에서 천상의 물 한 방울에 갈증을 느끼듯
이 세상에서 천상의 물을 갈망했다면
하느님 나라와 그렇게 담 쌓고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 무관심과 단절은 라자로와의 단절입니다.
아니 라자로로 대표되는 문 밖 세상과의 단절입니다.
이 세상에서 라자로는 부자의 문간밖에 살고 있었습니다.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라자로가 간절히 바랐다는 것은 부자가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부자가 잘 주었다면 간절히 바랄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겠지요.
라자로의 가난은 부자가 주지 않은 결과로서의 가난입니다.
우리는 깊은 숙고 없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이 그의 운명이거나
그가 벌지 않아서 가난하거나 능력이 없어서 가난한,
그야 말로 나와는 상관없는 그의 문제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 가난은 우리가 주지 않아서 가난한 것입니다.
내 집 안에서 나의 가족과 아무 부족함 없이 즐겁고 행복하기에
나는 내 문 밖의 존재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이 단절이
누구도 건널 수 없는 저승과 천국의 단절이 되고
이 세상에서 라자로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은 부자는
저승에서 물 한 방울조차 받을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저승에 간 이유는 부자였다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줄 수 있었음에도 주지 않았던 그 이유가 제일 큰 이유였습니다.
이 사순절, 우리의 사랑 실천에 대해 돌아봅니다.
살려고 애쓴답니다. 무관심의 극치라고나 할까요~
나 자신의 일만해도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 지경이니
다른사람의 일..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지향을 지녔다 하더라도..
까지 돌봐주고 관심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턱없이 모자라는 그릇이거든요..
나 자신의 일이라도 똑바로 하고 살고 싶은 마음인데..그렇게 살면 안되는거군요.
예수님을 찾아왔다 돌아간 부자 청년의 씁쓸함을 이해할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부유해서 행복하다고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함부로 평가할 것이 아니네요.
이웃의 가난을 내 자신의 구원의 기회로 삼도록 하신 것은
인간의 뿌리 깊은 이기심을 제대로 겨냥한 하느님의 기막힌 구상이다 싶네요.
이웃과의 나눔은 결국 나를 위한 일이라는데
그를 어찌 무관으로 간주할 수 있나요. 발 벗고 나서야지요.
영원에 비하면 이 세상은 한 순간이라는데
한 순간으로 영원을 산다면 그거야 말로 대박이다 싶지요.
줌으로써 받는다는 말도 있듯이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끝까지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불쌍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라자로는 가난했다는 이유로 천국에 갈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신부님 말씀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라자로가 천국에 갈수 있었던 이유는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관심과 단절이 일상이 되어버린 저에게 오늘 복음이 무척 두려운 말씀입니다.
날마다 하느님 말씀으로 깨닫게 해주시는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분명히 하느님께서 저에게 "네가 돌보라"라고 명령하신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맡기신 일들을 잘 해서 좋은 딸이 되고 싶습니다.
더 가진 몫은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기 전까지는 도둑질한 물건으로 남는다".
" 가난은 가난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다" Leonardo Boff 의 말이 생각납니다.
많이 가진 것.. 그 자체가 죄가 아니라, 가진 것만큼 이웃에게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고, 그 책임은 진정한 포기와
나눔으로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 되겠지요.
이 가난이 우리의 축복이지만, 누가 이 길을 자기 힘으로 갈수 있을까요?
하느님 절대 사랑에 신뢰하며, 오직 하느님 뜻만 찾았던 예수님의 길 만이
우리에게 그 은총의 힘을 보내 주시리라 믿어요..
가진 것이 많아 근심하는 빛으로 예수님을 등지고 떠났던 부자 청년의
뒷모습에서 이 글을 쓰는 저의 모습과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 모든 물질적 재화와 정신적 소유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축복과 성사(聖事)' 되는 날을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