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기 것이 없어서 떠난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무엇이든지 풍성하지만
다 아버지 것이고 자기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작은 아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다릅니다.
큰 아들에게 한 말에서 아버지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 모두,
모든 것이 다 아버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아버지 것이라는 생각은 맞습니다.
모든 것은 다 아버지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당신 것이 다 자식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자식들은 아버지 것은 아버지 것이고
내 것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로 살림을 차리려는 이 마음,
이 마음이 아버지 집의 그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다 쪽박을 찬 다음에야 그 풍요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누리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처지가 된 것,
그것 참으로 안타까운 얘기지만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리움 그것은 한 편으로는 상실의 아픔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소중한 갈망이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그것이 지천으로 많을 때는 그 귀중함을 모르고
전에 그것을 누리고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몰라 버리고 떠났는데,
잃고 나서야 그 귀중함을 알고
가난해진 다음에야 그것을 갈망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잃고 난 뒤에 그 소중함을 압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아내를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부모를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이것이 인간의 구조인가 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가지고 있을 때는 소중한 줄을 모르고
꼭 잃고 나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될까요?
이것이 풍요를 살지 못하는 쪽박근성입니다.
우리가 진정 가난하고 겸손하다면 늘 현재적으로 풍요를 사는데
가난하고 겸손하지 못하기에 거만하게 그 풍요를 우습게봅니다.
그러다 쪽박을 차고 난 뒤에야
'주지는 못할 망정 깨지나 말라'고 하며
쪽박을 그리 애지중지합니다.
얼마나 우습습니까?
전에는 쪽박이 무엇입니까?
은총과 사랑이 널려 있었을 때는 쪽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쪽박이 소중하고
쪽박만큼의 풍요라도 감지덕지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
오늘 작은 아들을 바라보며
주변의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을 잃고 사는 것이 아닌지,
그 은총을 쪽박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봅시다.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기 것이 없어서 떠난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무엇이든지 풍성하지만
다 아버지 것이고 자기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작은 아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다릅니다.
큰 아들에게 한 말에서 아버지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 모두,
모든 것이 다 아버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아버지 것이라는 생각은 맞습니다.
모든 것은 다 아버지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당신 것이 다 자식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자식들은 아버지 것은 아버지 것이고
내 것이 따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로 살림을 차리려는 이 마음,
이 마음이 아버지 집의 그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다 쪽박을 찬 다음에야 그 풍요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누리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처지가 된 것,
그것 참으로 안타까운 얘기지만 그래도 다행입니다.
그리움 그것은 한 편으로는 상실의 아픔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소중한 갈망이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그것이 지천으로 많을 때는 그 귀중함을 모르고
전에 그것을 누리고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몰라 버리고 떠났는데,
잃고 나서야 그 귀중함을 알고
가난해진 다음에야 그것을 갈망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잃고 난 뒤에 그 소중함을 압니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아내를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부모를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이것이 인간의 구조인가 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가지고 있을 때는 소중한 줄을 모르고
꼭 잃고 나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될까요?
이것이 풍요를 살지 못하는 쪽박근성입니다.
우리가 진정 가난하고 겸손하다면 늘 현재적으로 풍요를 사는데
가난하고 겸손하지 못하기에 거만하게 그 풍요를 우습게봅니다.
그러다 쪽박을 차고 난 뒤에야
'주지는 못할 망정 깨지나 말라'고 하며
쪽박을 그리 애지중지합니다.
얼마나 우습습니까?
전에는 쪽박이 무엇입니까?
은총과 사랑이 널려 있었을 때는 쪽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쪽박이 소중하고
쪽박만큼의 풍요라도 감지덕지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
오늘 작은 아들을 바라보며
주변의 너무나도 소중한 것들을 잃고 사는 것이 아닌지,
그 은총을 쪽박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되돌아봅시다.
가진 것이 더 많음을 알아야 한다.
내 안에
임마누엘 하느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
행복 할수 있는 조건 들이 너무 많아서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강론을 읽으면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주신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믿는다면..
내 것을 챙기기 위해서 그처럼 애쓰지는 않을텐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나 내 것은 어디에 있나.. 무엇이 나에게 유리한가.. 생각하는 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