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오늘의 복음은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주님께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되살리신 얘기입니다.
저는 과부 얘기만 나오면 과부가 얼마나 불쌍한지,
과부에게는 남다른 사랑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듭니다.
저의 어머니가 과부셨고,
과부의 설움을 제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30대 초반에 과부가 되셨고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저의 어머니가 더 병약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저의 어머니는 아플 새도 없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홀로 가정을 끌어가셔야 했지요.
한 번은 제가 보는 앞에서 어떤 아주머니로부터
“서방 없으면 서방 없는 한탄이나 하라!”는 폭언을 들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과부를 남달리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님께서 오직 하나의 희망인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가엾이 보신 것이나
그의 외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오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나
너무도 당연하다고 심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정말 이래도 되는지 이성적으로 묻습니다.
인정에 이끌려 기적을 하시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 구원의 공평성에 반하는 것이 아닌지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치유의 기적이 필요한 사람이 어디 한 둘이고
외아들을 잃은 과부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그리고 많고도 많은 사람 중에
우연히 마주친 나인의 과부만 자비를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하느님의 구원이 주님께서 생각지도 않았는데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 되어서는 아니 되지요.
그러므로 과부 아들이 살아난 사건을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될 겁니다.
과부 아들이 살아난 것은 불공평하지도,
생각지도 않다가 인정에 끌려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그만의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특별히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면
저만을 위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저만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아들이 되살아난 것을 보고
사람들이 과부의 아들만 은총을 받았다고 얘기하거나
과부만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시기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특별한 어느 한 개인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 백성 모두에게 오신 것이고,
그렇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하느님은 오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뒤집어 얘기하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오심이 제외되는 것이지요.
그에게도 오셨지만 그에게만 하느님은 아니 오신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주어진 은총이 모든 사람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한 사람이 받은 은총을 혼자 지녀서는 아니 되고,
그것을 본 사람도 가만히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과 외아들과 사람들처럼 말해야 합니다.
주님은 외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외아들은 일어나 앉아 말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다"고 말합니다.
말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표시입니다.
복음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다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게 오셨다고 사람들에게 말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