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짧은 기도 안에서 눈길이 가는 말이 있습니다.
“속으로”
“저의 기쁨”
그러니 기쁨은 기쁨이로되 예수님의 기쁨을 누리라는 말씀이요,
겉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아니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도 느낀다!
속으로 느낀다!
그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겉으로는 이별의 슬픔이지만
속으로는 만남의 기쁨이 아닐까요?
제자들에게서는 떠나지만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서도 발생해야 합니다.
떠나감으로 떠남이 늘 향해 감이 되고
헤어짐이 늘 만남이 되는 것 말입니다.
떠나기만 하고 감이 없으면 그것은 슬픔입니다.
가기만 하고 만남이 없으면 그것은 방황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우리의 인생이
떠나기만 하고 만남이 발생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생이 슬프고 허무합니다.
이제 우리 인생은 모든 떠남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예 하느님 만남 안에서 떠납니다.
만남 없는 떠남은 결코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떠나지만 속으로는 만납니다.
하여 남이 볼까 조심스러운 아주 내밀한 기쁨입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짧은 기도 안에서 눈길이 가는 말이 있습니다.
“속으로”
“저의 기쁨”
그러니 기쁨은 기쁨이로되 예수님의 기쁨을 누리라는 말씀이요,
겉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아니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도 느낀다!
속으로 느낀다!
그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겉으로는 이별의 슬픔이지만
속으로는 만남의 기쁨이 아닐까요?
제자들에게서는 떠나지만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서도 발생해야 합니다.
떠나감으로 떠남이 늘 향해 감이 되고
헤어짐이 늘 만남이 되는 것 말입니다.
떠나기만 하고 감이 없으면 그것은 슬픔입니다.
가기만 하고 만남이 없으면 그것은 방황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우리의 인생이
떠나기만 하고 만남이 발생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생이 슬프고 허무합니다.
이제 우리 인생은 모든 떠남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예 하느님 만남 안에서 떠납니다.
만남 없는 떠남은 결코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떠나지만 속으로는 만납니다.
하여 남이 볼까 조심스러운 아주 내밀한 기쁨입니다.
삶의 기쁨은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만난적이 없는 저를 믿는 마음으로 염려해 주시는
님의 마음에서 충만이 느껴지네요.
이래서 삶은 또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제가 댓글을 쓰면서도 넘 인간적인 것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기도 한데,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아프신 것인지...아님...
올려주신 글의 다른 각도를 함께 묵상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 좋았습니다.
항상 부족하고 죄스러운 삶이지만,
우리 복음을 묵상하며 하루 하루 새롭게 시작 합시다!!!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이라 하지요.
다시는 이별이 없는 만남 말입니다.
그러나 다시는 이별이 없는 영원한 만남을
고대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사랑을
많이 나눈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왜냐하면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우연이라도
마주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역으로 미워하는 감정이 마음에 남아 있으면
마주칠까 두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도해서지요.
그러니 부활의 삶과 사랑은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그러니 지금 여기서 사랑을 사는 사람만이
영원한 삶인 부활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고
우리 신앙이 왜, 부활신앙이고 부활신앙이어야
하는가도 알아들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사랑을 많이 한 사람이 부활의 기쁨도 맛볼 수 있다면
‘가진 자가 더 갖는다.’는 말,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겠다 싶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