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지난 주 성령을 통해서 예수는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된 우리가
이제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삼위이시고 삼위이시나 일체로서 계시며
삼위일체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삼위일체로 우리를 구원하심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첫째 독서 잠언서는
지혜이신 성자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시며
천지창조에 함께 참여하셨음을 얘기합니다.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고
잠언은 얘기합니다.
이것을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는 행위가
아무 것도 없는 허무 가운데서 하느님 홀로 이루시는
매우 고독한 작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생명공학자가 실험실에서 혼자 수 없이 실험을 하다가
마침내 복제 개를 생산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보다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를 너무도 사랑하여
사랑의 결실로 한 아이를 낳는 것과 같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를 닮은 아이를 갖기 원하여
둘을 모두 닮는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기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나의 아이를 갖기 원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너의 아이인 나의 아이는
이제 너에 대한 사랑이요
동시에 너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는 너와 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창조는 사랑입니다.
실험실의 조작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지
실험적 작업으로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한 분 하느님이시지만 결코 혼자 창조하지 않으시고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이신 성령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성부께서 성자 안에서 성령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창조의 완성인 구원사업도 이루십니다.
살아가다보면 아무런 기쁨도 희망도 없고
이러한 삶 가운데는 하느님도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낳아만 놓고 돌보지 않는 부모처럼 하느님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없이 나 혼자 고통과 싸우고 있다고 느껴질 그 때
그러나 그것이 나 혼자가 아니고
주님께서 늘 함께 계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 주님께서 늘 함께 계셨지만 사실은 내가 그 주님을 도외시하고
나 혼자 그 고통과 싸우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바울로 사도가 사도행전에서 얘기하듯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는데도
평소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다가
마치 숨이 막힐 때에야 공기의 존재를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공기가 없는 듯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어느 그루가 얘기하듯
우리는 물속에 있으면서 목마르기도 하는데
물이 있는데도 물이 없는 줄 알고 입을 꽉 다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숨 쉬는 공기,
늘 만나는 햇살,
언제나 서 있는 나무,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의 현존인데
우리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인줄 모르고
하느님을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숨 쉬는 순간 들이키는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2독서는 우리가 받은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고통 속에서도 인내와 끈기와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게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우리 고통은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을 숨 쉬지 않은 고통이었고
하느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하지 않으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로의 말씀을 듣지 않은 고통이었고
하느님께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으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을 뿌리친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하신 것들이요,
바로 하느님의 성삼위적인 현존임을 깨달으며 살아갑니다.
지난 주 성령을 통해서 예수는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된 우리가
이제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삼위이시고 삼위이시나 일체로서 계시며
삼위일체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삼위일체로 우리를 구원하심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첫째 독서 잠언서는
지혜이신 성자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시며
천지창조에 함께 참여하셨음을 얘기합니다.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고
잠언은 얘기합니다.
이것을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는 행위가
아무 것도 없는 허무 가운데서 하느님 홀로 이루시는
매우 고독한 작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생명공학자가 실험실에서 혼자 수 없이 실험을 하다가
마침내 복제 개를 생산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보다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를 너무도 사랑하여
사랑의 결실로 한 아이를 낳는 것과 같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를 닮은 아이를 갖기 원하여
둘을 모두 닮는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갖기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나의 아이를 갖기 원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너의 아이인 나의 아이는
이제 너에 대한 사랑이요
동시에 너에 대한 사랑을 넘어서는 너와 나의 사랑입니다.
이렇게 창조는 사랑입니다.
실험실의 조작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지
실험적 작업으로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한 분 하느님이시지만 결코 혼자 창조하지 않으시고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이신 성령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성부께서 성자 안에서 성령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창조의 완성인 구원사업도 이루십니다.
살아가다보면 아무런 기쁨도 희망도 없고
이러한 삶 가운데는 하느님도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낳아만 놓고 돌보지 않는 부모처럼 하느님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없이 나 혼자 고통과 싸우고 있다고 느껴질 그 때
그러나 그것이 나 혼자가 아니고
주님께서 늘 함께 계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 주님께서 늘 함께 계셨지만 사실은 내가 그 주님을 도외시하고
나 혼자 그 고통과 싸우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바울로 사도가 사도행전에서 얘기하듯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는데도
평소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다가
마치 숨이 막힐 때에야 공기의 존재를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공기가 없는 듯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어느 그루가 얘기하듯
우리는 물속에 있으면서 목마르기도 하는데
물이 있는데도 물이 없는 줄 알고 입을 꽉 다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숨 쉬는 공기,
늘 만나는 햇살,
언제나 서 있는 나무,
언제나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의 현존인데
우리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인줄 모르고
하느님을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숨 쉬는 순간 들이키는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2독서는 우리가 받은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고통 속에서도 인내와 끈기와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게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우리 고통은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을 숨 쉬지 않은 고통이었고
하느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하지 않으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위로의 말씀을 듣지 않은 고통이었고
하느님께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으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을 뿌리친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을 받은 우리는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마련하신 것들이요,
바로 하느님의 성삼위적인 현존임을 깨달으며 살아갑니다.
늘 만나는 햇살
언제나 서 있는 나무
이런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현존 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숨결임을,하느님의 신비임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창조주 성부님을,구세주 성자님을
사랑의 입김 성령님을 가슴 깊이 모시고 살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