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가끔 결혼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부부에게 우스갯소리로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당신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살고 있는 남편 혹은 아내와 결혼하겠습니까?”
아마도 추측컨대 이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부부들이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우리나라의 높은 이혼율이 잘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저에게도 이러한 우스갯소리를 던진다면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자신 있게 ‘수도생활을 계속하고 있겠지요!’라고 대답한다 해도 현실에서는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수도생활을 오랫동안 하고는 있지만, 세상에 대한 미련과 여러 개인적인 이유로 환속하는 비율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가끔씩 성소자들을 만나서 프란치스칸 삶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질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소금의 짠 맛은 우리에게 고유한 맛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인공적으로 짠 맛을 가공한다고 해도
그 맛은 소금의 고유하고 순수한 모습을 만들어내진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에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소명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 주어진 소명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혹은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으려 한다면, 순수한 짠 맛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녹아있는 소금의 짠 맛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바라보고 드러낼 때
하느님의 모습이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지 않을까요?
“만일 당신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살고 있는 남편 혹은 아내와 결혼하겠습니까?”
아마도 추측컨대 이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부부들이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우리나라의 높은 이혼율이 잘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저에게도 이러한 우스갯소리를 던진다면
어떠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자신 있게 ‘수도생활을 계속하고 있겠지요!’라고 대답한다 해도 현실에서는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수도생활을 오랫동안 하고는 있지만, 세상에 대한 미련과 여러 개인적인 이유로 환속하는 비율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가끔씩 성소자들을 만나서 프란치스칸 삶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질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소금의 짠 맛은 우리에게 고유한 맛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인공적으로 짠 맛을 가공한다고 해도
그 맛은 소금의 고유하고 순수한 모습을 만들어내진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에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소명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그 주어진 소명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혹은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으려 한다면, 순수한 짠 맛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녹아있는 소금의 짠 맛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바라보고 드러낼 때
하느님의 모습이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지 않을까요?
이 표현 그대로 살다 보니 때로는 허허로움 속에 잠기게 됩니다
삶에 순응하지 못해 보이는듯 약지도 못하고 빠르지도 못해
느을 걸어야만 되는 내 일상이 빠쁜 세상살이에 뒤 떨어지지만
"있는 그대로 나 " 가 아름다워 웃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달픔 역시 예수마음으로 헤아려 본다면, 직장동료의 "사랑을 먹었다"라는 표현처럼 사는맛이 씁쓸하지않으며 달콤함으로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께서 주신 대로 , 생긴대로
충실하게 살아 갑니다.
짙어가는 녹음에서
벌써 부터 뜨거운 태양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 바라 봅니다.
제가 일하는 병원은 각 교구에서 현장체험으로 신학생을 보내고 있고
수개월 동안 병동에서 온갖 허드레 일을 정성을 드려 하고 있는 젊은
성소자들을 보며 기적은 베드로 사도가 물위를 걸었던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성소의 길을 걷고 있는 젊은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이 시대의 기적을 확인하며 어쩌면 신비가 만이 감지 할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신비를 피부로 느끼게 한다 싶습니다.
인간 예수님의 육화는 이렇게 전승된다 싶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님이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바라보고 드러낼 때
하느님의 모습이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으로 드러나지 않을까요?‘
라는 말씀과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하느님적이다’는 말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며 예수 성심의 마음으로 육신의 치유를 위해 찾아오는 이들의
마음까지 살피는 오늘이 되도록 마음을 쓰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