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창세기 얘기는 하느님의 잔인한 테스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것도 물건이 아닌 사람이요 사람 중에서도
늘그막에 얻은 외아들을 포기하라는 테스트입니다.
그런데 이런 테스트를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느님의 잔인함일까요, 그렇게 이해하기 쉽진 않지만, 오히려 사랑일까요?
테스트는 보통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상태나 정도를 알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단련이나 성장 또는 성숙을 위함입니다.
저도 양성 책임을 맡고 있을 때 이런 의미에서 테스트를 하곤 했는데
예를 들어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가보겠다고 할 때
보내주기로 이미 마음먹고 있으면서도 갈 수 없다고 하고는
청원자가 포기한 것을 안 뒤에 허락을 하곤 하였지요.
이때 청원자는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행사에 보내지 않는지 그 비인간적인
처사에 일차적으로 화가 나 부글부글 끓고 나중에 허락을 받고는
청원장이 자기를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에 더 큰 분노를 하곤 하였지요.
그러나 저는 교육적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를 위한 것이고 사랑으로 그리한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족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는 가르침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자기 의지를 꺾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거였지요.
오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테스트하신 것도 이와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복음적 권고인 순종과 가난과 정결의 실천과
이 모든 실천의 기초인 믿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는다면 어떤 것을 명해도 순종해야겠지요.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지금 보기에는 매우 잔인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나를 위한 사랑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아무리 소중해도 그것을 포기해야겠지요.
하느님께서 선이시고 또 모든 선의 주인이시며
그 선을 주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소유한 것을 포기하는 것도 가난이지만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때에 주시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주시도록
아예 소유하려는 마음 곧 욕심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가난입니다.
이것이 오늘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얘기하는 야훼 이레의 가난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믿는다면 만유 위에 하느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소중한 것도 하느님만큼 소중하지 않고,
아무리 부모와 자식을 사랑해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으며
하느님 사랑과 자식 사랑 중에 택일을 해야 한다면 하느님 사랑을
선택하고 오늘 아브라함처럼 자식 사랑을 포기하고 희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자기 외아들 이사악을 봉헌한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 그리스도를 우리에에
희생 제물로 봉헌하신 것의 예표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이런 하느님을 믿고 이렇게 하느님을 믿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운데
아무튼,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테스트를 받고 있고,
하느님을 선택할 때까지 이 테스트는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잔임함일까요? 사랑일까요?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