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위선을 나무라자 율법 교사가 하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도 나무라십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거의 한 묶음으로 보시고
우리가 보기에도 이들은 다를 바 없는데도
율법 교사는 자기들이 바리사이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다름이 없지 않겠지만
조금 다른 것을 가지고 많이 다르다며 괜찮다고 하고
조금 덜 한 것을 가지고 자기들은 괜찮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이 자기를 합리화하는 방식이 다 이렇습니다.
더 큰 악에 우리의 조금 작은 악을 숨기고,
더 큰 죄에 우리의 조금 작은 죄를 죄 아닌 양 합리화하며,
주동자가 아닌 것에 내 책임은 없다고 안심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조금 작은 죄라고 죄가 아니고,
주동자主動者가 아닌 부동자副動者라 하여 범죄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신문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들에 그렇게 흥분하는 것은
사실 그 악행에 대한 의로운 분노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죄에 비해 나의 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뻔뻔한 최면행위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그 분노의 행위가 아니라
죄 많은 인간들이 자기 죄는 보지 못하고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려는 그 집단적인 히스테리 행위입니다.
그의 죄를 크게 만듦으로써 나의 죄를 감추고
그를 찌름으로써 나를 찌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최악이 아닌 것에 안심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 곧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것을 추구한다면
절대로 그리 뻔뻔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면교사反面敎師와 타산지석 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있지요.
둘 다 다른 사람의 잘잘못에서 교훈을 얻으라는 말이지만
반면교사는 남의 잘못에서 배우라는 것이니
공동체의 어두운 면을 보는,
그래서 부정인 배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잘못한 것을 보고도 나의 유익이 되게 하라는 것이니
더 대단하고 역설적인 배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에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보고 배울 훌륭한 분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또 나의 잘못을 감출 수 있어서가 아니라
보고 배울 반면교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를 보기보다 나를 본다면,
어떤 경우에도 나의 유익이 되도록 나를 성찰한다면
우리 주위에는 깨우치는 선생님들이 많습니다.
그럼나는, 거울처럼 모든 환경 을 통해 내 속사람
보여주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