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을 들 것이다.”
잎 새에 바람이 이는 것은 떨어질 때가 처음이 아닙니다.
이파리가 아직 나무에 달려 있을 때 바람은 수없이 방문을 하였습니다.
바람은 잎 새를 떨구기 위해서만 부는 것이 아니라
생동과 감동을 주기 위해서도 붑니다.
콩은 잎 새가 햇빛과 함께 바람을 먹어야만 한다지요.
그러나 콩잎만이 아니라 모든 이파리가 숨을 쉬어야 하고
바람의 방문을 받아야만 합니다.
오늘 말씀 나누기를 하기 전 <매일 미사>에 있는
전 승규 신부님의 <오늘의 묵상>을 읽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보지 않고 <매일 미사>를 통해서
매일의 말씀을 읽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고,
거기에 있는 <오늘의 묵상>도 잘 읽지 않는 사람인데
오늘은 왠지 보게 되었고 <오늘의 묵상>에 눈길이 머물었습니다.
저의 동창, 봉 경종 신부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9년, 서울대교구의 봉경종 신부는 백혈병과 일 년 넘게 투병하다가
45세의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저는 그의 장례 미사 때에 동창 신부의 강론을 듣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아름다운 이별이 주는 감동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은 봉 신부가 투병하며 마지막으로 쓴 일기입니다.
‘이제부터 봉헌이다. 새로운 삶으로 가기 위한 봉헌을 잘 준비하자.
주님, 저를 온전히 받아 주십시오.
앞으로 ‘호스피스 케어’를 받는 데 함께 도와주십시오.
당신을 향한 마음, 최후까지 흩어지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봉 신부는 자신에게 닥친 엄청난 시련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며 하느님께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왜 제가 이런 병에 걸렸나요? 하필 왜 저입니까?
주님, 연세가 드신 부모님보다 오래 살게 해 주세요.’
그러나 그의 일기의 마지막은 ‘아멘.’으로 끝을 맺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동창 중 벌써 3명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나도 친구처럼 죽음을 잘 맞이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도 하였는데,
동시에 주님을 내 생의 마지막에서야 만나면 아니 되지,
어느 때고 찾으시고, 늘 찾으시는 주님을 만나야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마지막에만 찾아오시는 주님은 사실 주님이 아닙니다.
그런 하느님은 저승사자이지 주님이 아니십니다.
바람이 잎 새를 떨구기 위해서만 불지 않듯
주님도 우리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해서만 찾아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돌아오시는 주님을 깨어 맞이하는 것도
저승사자 맞이하듯 벌벌 떨며 맞이할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콩 잎을 살랑이고 어루만져주듯
주님도 우리 마음을 살랑이고 어루만져주러 오십니다.
그러나 어루만져주심, 그것은 너무도 부드러운 손길.
피부가 깨어있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부드러운 손길.
그러니 이 부드러운 손길에 우리 감각, 영적 감각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은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더 나아가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은
손수 마련하신 식탁에 우리를 앉히시고
손수 시중을 드시겠다고 하십니다.
너무 황공하지만 너무 행복하겠지요?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두려워 하지마라
'내가' 라는 말씀 묵상,단풍 바람 주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