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로다, 허무!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렇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
제가 좋아하는 구약 성서 중의 하나가 코헬렛 서입니다.
그리고 코헬렛 서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 구절,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타령이 있습니다.
그것도 김 소희 명창이 부르는 흥타령입니다.
음악 방송에서 아주 가끔 틀어줄 때만 들을 수 있으니
누구 있어 이 귀한 음반을 구해주신다면 정말 감사드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둘을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이유는 “허무” 때문입니다.
저는 허무 감정과 허무 체험을 좋아합니다.
그것도 가짜 허무 체험이 아니라 진짜 허무 체험이고
얼치기 허무 체험이 아니라 찐한 허무 체험입니다.
인생의 크나큰 방황을 할 때, 저는 두 가지 큰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프란치스코처럼 가장 성스럽고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프란치스코처럼 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미흡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더 할 수 없이 치열하게 프란치스코처럼 되려고 저는 애썼습니다.
길게 잡으면 9년, 짧게 잡으면 6년을 그렇게 애썼지만
프란치스코처럼 되지 못했고
더 있어 봤자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수도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정 반대의 길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일반 대학 좋은 데를 들어가서 세속적으로 성공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때는 제 머리를 믿었기에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달을 지내던 저에게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처럼 되려 했던 것도 세속적인 성공과 마찬가지로
사실은 하느님은 배제한 채 내가 무엇이 되려 했던 것이고,
그것도 내 힘으로 되려 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육적인 정신으로 프란치스코처럼 되려 했으니 될 수 없었던 것이고,
저는 장작불이 다 타고 재만 남듯이
프란치스코처럼 되려 했던 그 열정과 애씀은 허무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허무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저의 인간적인 열정과 애씀이 허무로 돌아갔을 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시었습니다.
그것은 제 존재의 시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늘 뭔가를 새로 도모하며 살아왔는데
그러나 저는 본시 없음에서 시작된 존재이고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존재가 허무하고 제가 하는 모든 것 허무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허무에서부터,
아니 하느님으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허무는 저의 태이고,
저의 고향이며,
저의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우 미래지향적이고 지난 일은 잘 잊어 먹습니다.
과거의 것은 빨리빨리 허무로 돌리고 새로운 시작을 합니다.
쌓았던 모래성을 허물고 다시 쌓듯
저는 지금까지 하던 것을 허무로 돌리고 새로 시작을 합니다.
어떤 때는 제가 허물지만
어떤 때는 파도가 모래성을 지어버리듯 하느님께서 허무십니다.
지난 몇 년 간 공들인 평양의 평화 봉사소가 이 정부 들어와서
거의 완전히 허무로 돌아갔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언젠가 다시 시작되겠지만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허무도 괜찮습니다.
완전히 허무로 돌리고
저는 다른 것을 또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그 모든 노고와 노심으로
인간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의 나날은 근심이요, 그의 일은 걱정이며,
밤에도 그의 마음은 쉴 줄을 모르니, 이 또한 허무이다.”
제가 좋아하는 구약 성서 중의 하나가 코헬렛 서입니다.
그리고 코헬렛 서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 구절,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타령이 있습니다.
그것도 김 소희 명창이 부르는 흥타령입니다.
음악 방송에서 아주 가끔 틀어줄 때만 들을 수 있으니
누구 있어 이 귀한 음반을 구해주신다면 정말 감사드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둘을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이유는 “허무” 때문입니다.
저는 허무 감정과 허무 체험을 좋아합니다.
그것도 가짜 허무 체험이 아니라 진짜 허무 체험이고
얼치기 허무 체험이 아니라 찐한 허무 체험입니다.
인생의 크나큰 방황을 할 때, 저는 두 가지 큰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프란치스코처럼 가장 성스럽고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프란치스코처럼 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미흡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더 할 수 없이 치열하게 프란치스코처럼 되려고 저는 애썼습니다.
길게 잡으면 9년, 짧게 잡으면 6년을 그렇게 애썼지만
프란치스코처럼 되지 못했고
더 있어 봤자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수도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정 반대의 길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일반 대학 좋은 데를 들어가서 세속적으로 성공하기로 마음먹었고
그때는 제 머리를 믿었기에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달을 지내던 저에게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프란치스코처럼 되려 했던 것도 세속적인 성공과 마찬가지로
사실은 하느님은 배제한 채 내가 무엇이 되려 했던 것이고,
그것도 내 힘으로 되려 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육적인 정신으로 프란치스코처럼 되려 했으니 될 수 없었던 것이고,
저는 장작불이 다 타고 재만 남듯이
프란치스코처럼 되려 했던 그 열정과 애씀은 허무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허무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저의 인간적인 열정과 애씀이 허무로 돌아갔을 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시었습니다.
그것은 제 존재의 시작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늘 뭔가를 새로 도모하며 살아왔는데
그러나 저는 본시 없음에서 시작된 존재이고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존재가 허무하고 제가 하는 모든 것 허무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허무에서부터,
아니 하느님으로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허무는 저의 태이고,
저의 고향이며,
저의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우 미래지향적이고 지난 일은 잘 잊어 먹습니다.
과거의 것은 빨리빨리 허무로 돌리고 새로운 시작을 합니다.
쌓았던 모래성을 허물고 다시 쌓듯
저는 지금까지 하던 것을 허무로 돌리고 새로 시작을 합니다.
어떤 때는 제가 허물지만
어떤 때는 파도가 모래성을 지어버리듯 하느님께서 허무십니다.
지난 몇 년 간 공들인 평양의 평화 봉사소가 이 정부 들어와서
거의 완전히 허무로 돌아갔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언젠가 다시 시작되겠지만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허무도 괜찮습니다.
완전히 허무로 돌리고
저는 다른 것을 또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살면서 절절히 느껴지는 말씀이거든요.
그 허무를 절감할때 저도 새로운 발돋움으로 용기가 생겨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고정관념도 없어지고 그 바탕위에 새 생활을 하기위해 새로운 계획도 세워봅니다.
오늘 본당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저도 오늘, 내일 미루었던 새로운 각오를 8월 첫날을 맞이하여 작심하였습니다.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가지고 애쓰고서는 애쓰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제 몫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요 커다란 불행이다." 라는 말씀이 와 닿으며 내가 잘못하여 우리의 후손들이 나로인해 불행해지지 않도록 삶의 전환점을 마련해 봅니다.
그리고 시작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존재의 허무함에 오랫 동안 헤매다가
이제 그리스도 십자가를 만나서
그 허무함에서 서서히 벗어 나고 있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한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제가 가진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기쁜 일도 슬픈 일도 힘든 일도 아쉬운 일도..
모두 털어버리고 새롭게 8월을 시작합니다.
오늘 강론 말씀이 영혼을 울리네요..^^
타고 남은 재를 보면 제 자신을 보는 것 같아요.
인간의 끝이 하느님의 시작이니..
저도 신부님따라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다시 시작하렵니다.
멋진 8월! 기대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