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날을 기리면서 문득 지난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아니 실없이 지난 얘기를 제가 떠올렸다고 함이 맞을 겁니다.
서울에 있을 때 매주 노인 요양원에 가 미사를 드렸는데
하루는 그 날이 마침 모든 성인의 날이었습니다.
강론을 하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여쭈었더니
할머니 한 분이 큰 소리로 ‘어른들의 날’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聖人의 날이 모든 成人의 날이 된 것입니다.
미사를 드리던 분들 모두 크게 웃었습니다.
제가 수도자 장상 협의회 회장일 때 ‘축성생활의 날’을
남녀 수도자 장상 협의회 주관으로 기념하였는데,
그때 명동 성당 들머리에 현수막을 걸기로 했지요.
당일 행사를 점검하기 위해 조금 일찍 성당에 갔더니
“축 성생활의 날”이라는 현수막이 딱하니 걸려있는 것이었습니다.
축성생활의 의미를 모르는 간판업자가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가 아는 대로 ‘축성생활’을 ‘성생활’로 바꾼 겁니다.
성생활이 그리도 중요한 그 업자에게는
축성생활(수도생활)도 성생활로 둔갑되고 맙니다.
아무튼 이 <성>자가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신학사전이 아닌 일반 사전에서는
<거룩하다>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해서 한 번 찾아봤습니다.
“성스럽고 위대한 것”으로 뜻풀이를 하였고,
성스러움을 무엇으로 풀이하는지 봤더니
“범상한 경지를 넘어 거룩하며 고결한” 것으로 풀이하였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웠던지, 그 풀이가 궁색합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풀이에서는 거룩함을 평범한 것이 아닌,
보통 이상의 초월적 경지를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기준으로 설명치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거룩함은 하느님의 거룩함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의 거룩함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미다스의 손이 나오는데
그가 만지는 것은 모두 금으로 변한다는 얘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거룩함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손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람은 성생활을 하지 않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에세네파와 같이 정결례와 금욕을 철저히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도가에서 얘기하는 선인仙人이나 초인超人도 아니고
유가에서 얘기하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나
요가니 단학이니 갖가지 수련으로 도의 경지에 오른 도인도 아닙니다.
그러니 성인은 아무나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비춰보면 거룩한 사람은
그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이고
오늘 서간에 비춰보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본래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란 하느님의 자녀임을 모르다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살다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시작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것을 사랑하다가
하느님의 사랑만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정결한 자녀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거룩한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
곧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자聖子가 되기로 오늘 마음먹읍시다.
이제 지금부터 하느님 만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