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하느님의 배신감
우리는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배신감을 느끼신 것이 아닐까,
느꼈다면 우리와 똑같은 배신감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우리의 배신감은 믿고 돈을 빌려줬는데 갚지 않고 도망치고,
헌신적으로 사랑을 했는데 돈을 쫒아 가고,
믿었던 친구가 나를 뒤에서 모함하고,
믿고 비밀을 애기했는데 까발리고,
대체로 이런 것들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도 우리를 믿으시고
믿어서 배신감을 느끼실까요?
아니면, 믿지도 않으시고
배신감도 없으실까요?
제가 자주 얘기하듯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종종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음으로써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으시지만
우리가 당신과 같을 거라고 결코 믿지 않으시고
무엇보다 우리가 당신 기대에 부응하리라 믿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를 믿는다면 무엇을 기대하고 믿을까요?
우리가 어린 아이를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차라리 사랑일 것입니다.
우린 어린 아이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믿는 것이 아니고
그저 사랑하고, 굳이 믿는다면 사랑을 사랑할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어린 아이가 어른 뺨치게 너무도 영악해서
사랑은 원치 않고 단지 자기가 원하는 것만 채우려고 한다면
실망감과 함께 정나미가 똑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가 그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을 수 없다면
서글픔과 함께 안타까움을 대단히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감사드리러 오지 않는 나환자들에게 느끼신 감정은
배신감, 곧 기대의 어긋남에서 오는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일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은 받지 않고 돈만 챙기고
사랑은 받지 않고 치유만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랑이 선물임을 느끼는 사람만이 할 수 있으며,
선물이 또한 사랑임을 느끼는 사람만이 할 수 있지요.
선물에서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원하는 물건을 소유한 기쁨에 머무는 아이라면,
그것도 부모가 당연히 줘야 할 것을 준 것이라고 여기는 아이라면
그 아이는 아무런 감사를 할 줄 모를 것이며,
감사할 줄 모르는 그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일 것입니다.
감사란 사랑의 충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며
가장 완벽한 행복감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서로들의 영광을 주고 받기에
내 모습 보여지며 진심으로 주님께 감사드리며
말씀말씀 눈 뜨게 해주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