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인생.
고통은 인생의 가장 크나큰 문제입니다.
오죽하면 인생은 苦海, 곧 고통의 바다라고 불교에서 얘기합니까!
그러므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인생을 얘기할 수 없고,
인생을 잘 살 수도 없습니다.
저의 오랜 주장, 지금도 하고 있는 주장이 뭔가 하면,
‘고통은 불행’이라는 등식은 잘 못 됐다는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불행한 것이지,
고통이 있으면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행복론,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를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아무런 고통이 없냐고 묻지만
저에게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저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고통이 더 많습니다.
다만 고통이 아무리 커도 나는 행복하겠다는 것,
고통이 있거나 없거나 무조건 행복하겠다는 저의 행복론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주장을 하는 것은
제가 누구보다 고통이 크고
제가 누구보다 행복하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의 고통과 저의 행복은 저보다 훨씬 더 고통이 크지만
저보다 훨씬 행복한 분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오늘 저는 그런 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고 욥만큼 일생 고통이 많았던 분인데
관계있는 분들이 이 글을 읽을지도 몰라,
읽으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조심스럽지만
좋게들 이해하시리라 믿고 소개하겠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저와 알고 지낸 결핵환자였습니다.
팔팔한 나이에 중증 결핵으로 재발, 또 재발을 하였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합병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특이한 것은
매년 사순 시기만 되면 거의 죽다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런 몇 년을 지나고 난 어느 해 성 금요일에
그분으로부터 고백성사를 보고 싶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울면서 면도칼을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것에
앞날이 캄캄해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 금요일에 주님의 십자가 고통과
주님께서 우릴 위해 돌아가셨음을 생각하니
자기가 너무 잘못 생각한 것 같아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 사랑을 체험한 이후 그분은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 욥처럼 자기가 태어난 것을 저주하던 사람이
자기 인생을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 인생을 사랑하기 시작하니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꿈도 꾸지 않았던 결혼도 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아이도 생겼습니다.
행복하다고 여러 차례 저에게 말하기도 하였지만
말하지 않았어도 행복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분을 보고서 저는
무조건 행복하다는 저의 행복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 자주 고통을 탓하지만
고통이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불행이고
불행한 것이 그의 고통이지
고통이 그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불안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는 고통이 있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지속적인 고통을 당할 때,
그때도 내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오늘 욥처럼 태어난 날을 저주하지 않을까?
고통은 인생의 가장 크나큰 문제입니다.
오죽하면 인생은 苦海, 곧 고통의 바다라고 불교에서 얘기합니까!
그러므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인생을 얘기할 수 없고,
인생을 잘 살 수도 없습니다.
저의 오랜 주장, 지금도 하고 있는 주장이 뭔가 하면,
‘고통은 불행’이라는 등식은 잘 못 됐다는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불행한 것이지,
고통이 있으면 그 자체로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행복론,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를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아무런 고통이 없냐고 묻지만
저에게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고,
어쩌면 저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고통이 더 많습니다.
다만 고통이 아무리 커도 나는 행복하겠다는 것,
고통이 있거나 없거나 무조건 행복하겠다는 저의 행복론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주장을 하는 것은
제가 누구보다 고통이 크고
제가 누구보다 행복하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의 고통과 저의 행복은 저보다 훨씬 더 고통이 크지만
저보다 훨씬 행복한 분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오늘 저는 그런 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고 욥만큼 일생 고통이 많았던 분인데
관계있는 분들이 이 글을 읽을지도 몰라,
읽으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조심스럽지만
좋게들 이해하시리라 믿고 소개하겠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저와 알고 지낸 결핵환자였습니다.
팔팔한 나이에 중증 결핵으로 재발, 또 재발을 하였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합병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특이한 것은
매년 사순 시기만 되면 거의 죽다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런 몇 년을 지나고 난 어느 해 성 금요일에
그분으로부터 고백성사를 보고 싶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울면서 면도칼을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것에
앞날이 캄캄해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 금요일에 주님의 십자가 고통과
주님께서 우릴 위해 돌아가셨음을 생각하니
자기가 너무 잘못 생각한 것 같아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 사랑을 체험한 이후 그분은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늘 욥처럼 자기가 태어난 것을 저주하던 사람이
자기 인생을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 인생을 사랑하기 시작하니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꿈도 꾸지 않았던 결혼도 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아이도 생겼습니다.
행복하다고 여러 차례 저에게 말하기도 하였지만
말하지 않았어도 행복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분을 보고서 저는
무조건 행복하다는 저의 행복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 자주 고통을 탓하지만
고통이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불행이고
불행한 것이 그의 고통이지
고통이 그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불안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는 고통이 있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지속적인 고통을 당할 때,
그때도 내가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오늘 욥처럼 태어난 날을 저주하지 않을까?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다섯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부활하셨는데도 고통을 느끼셨을까? 생각해 보다
토마 사도의 행동을 바라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않던 토마에게 상처에 손을 대어보라던 주님의 말씀에
부활하신 주님을 고백하며 만지지않은걸 보면...
주님의 상처에 손을대면 주님이 아파할까봐였을까?
그럴 가능성도 있었을거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모르지요.
그런데 내가 죽은후에도 이승에서처럼 기쁨, 슬픔, 행복, 불안, 아픔, 놀라움, 등등
인간이 살아서 느끼는 온갖 감정들을 죽어서도 느끼게될까?
모르지요.
그래서 저의 생각은 아무리 나의 고통이 크다해도 주님만큼 크지는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다." 감사 합니다.
고통은 살아 있음을 증명 해 주고
고통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 이며
기쁨이 왔다가 사라 지듯이
고통도 왔다가 흘러 감을 굳게 믿습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의 자비와
그로 인해 인생을 사랑하게 된
행복한 청년과 그의 가족이 맘을 훈훈하게 합니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케 해주셨으니
고맙습니다.
무조건 행복론에 찬성합니다.
일교차가 큰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