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기도질과 강도질.
기도질이라는 말은 없지만 강도질에 빗대어 한 번 말을 만들어봤습니다.
질이라는 말은 양치질, 톱질, 비럭질, 도둑질, 계집질 등에서 볼 수 있듯
일반적으로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안 좋은 행위를 나타내는 말에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다고 분노하시며 성전정화를 하십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하면
사람들이 성전에서 물건을 사고팔았으니 장사꾼의 소굴이라고 해야지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신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무슨 뜻으로 주님은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신 것일까?
강도란 강제로 남의 것을 뺏는 것이니
성전의 장사꾼이나 수석사제를 비롯한 백성의 지도자들이
성전을 찾는 사람들의 돈을 강제로 빼앗았다는 뜻이 됩니다.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라고 할 때의 그 날강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날강도는 어떤 강도입니까?
요리도 않고 날로 삼키는 강도라는 뜻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수석사제와 백성의 지도자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애쓰지 않고 남의 것을 뺏는 강도란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기도질이 강도질이 될 수도 있겠다싶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칼만 안 들었지 정말 강도질과 같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없고 그래서 아무 정성도 드리지 않고,
그러면서 하느님께는 뻔뻔스럽게 하는 말이
당신은 자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니
내가 원하는 것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강도질은 사람들을 상대로 원하는 것을 뺏는 것이라면
기도질은 하느님을 상대로 원하는 것을 뺏어내려는 더 대담한 짓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짜 분노하시는 것은 이런 기도질이 아닙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사제들의 기도질입니다.
백성의 기도질은 강도질이라고 해도
하느님께로 향하고 주십사고 청하는 겸손하고 소박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기도질은 정말 지저분하고 역겨운 것입니다.
사제란 본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계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하느님께도 없고 사람에게도 없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계집질이 사랑 없이 이 여자 저 여자를 농락하는 것이듯
이들의 기도질은 사랑 없이 하느님과 사람을 농락하는 것입니다.
그제는 부산에 가서 그곳 영한우리 음악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끝나고 식사를 하면서 음악을 하는 친구들의 고민도 들었습니다.
나이든 친구들은 자기도 배우면서 피아노 레슨을 알바로 합니다.
고민은 레슨해주는 아이들 중에 음악을 더 해봤자 가능성이 없는데
자기 수입이 줄더라도 일찌감치 그만 두라고 충고를 해줘야 하는지
아니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계속 레슨을 해줘야 하는지에 대한 겁니다.
저는 참으로 답하기 곤란하여
나의 수입이 아니라 사랑을 기준으로, 다시 말해
무엇이 그들에게 더 사랑인지를 가지고 판단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만
그들의 진지한 고민이 참으로 보기에 아름다웠고,
다른 한 편 제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읽으며 다시금 다짐합니다.
이제 나는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사이에서 기도질이나 하는 사제가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사랑의 중재를 하는 기도를 하리라고.
많이 생각하며,저 자신부터 청소하며
하느님의 진정한 거처 이시기를 감히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