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프란치스코 축일에는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바로 불효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와 나”라는 주제로 저를 반성하여 봤습니다.
프란치스칸으로서 나는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는가?
프란치스칸으로서 나는 프란치스코를 얼마나 닮았는가?
과거의 저는 정말로 프란치스코를 사랑했습니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그 어떤 성인보다도 사랑했고,
예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죄송스러울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큼 프란치스코를 닮았는지 제가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저는 사랑하는 것만큼 닮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언제부터일까요,
저의 사랑이 식었다고 할까요, 변했다고 할까요,
아무튼 전과는 다른 프란치스코 사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흠뻑 빠져 있던 저의 시선을
프란치스코로부터 예수님께로 돌렸습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것이고 잘 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튼 프란치스코에게로 향하는 저의 시선이 줄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인 것 같습니다.
전에는 마치 단순한 요한이 프란치스코를 그대로 흉내 내듯이
프란치스코를 그렇게 닮고 싶었고 그대로 따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단식했다는 말에 저도 단식하려고 했고,
프란치스코가 돌을 베고 잤다면 저도 돌을 베고 자려고 했고,
프란치스코가 거지 옷을 입고 다녔으니 저도 남루한 옷을 입으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프란치스코로부터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린 그 시기부터
저는 프란치스칸이기도 하지만 ‘나는 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프란치스칸이지만 프란치스코와 거의 모든 면에서 다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도 제가 저답게 하느님을 믿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제가 처한 상황에 맞게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와 다른 소명을 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전처럼 우상숭배 하듯이 프란치스코를 사랑하고
내가 아닌 프란치스코가 되려는 듯이 프란치스코를 닮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글라라는 저에게 답을 줍니다.
글라라와 프란치스코는 너무도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로 다르고,
평민과 귀족으로 다르고,
나그네 삶과 봉쇄 관상의 정주적 삶으로 다릅니다.
그래도 프란치스코를 사랑했고 닮았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이상을 사랑했고,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작음을 사랑했고,
프란치스코의 십자가 사랑을 사랑했고,
프란치스코의 선교적 열망을 사랑했고,
사랑하는 바를 자기 삶에 맞게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문제는 저답게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저다운 것을 핑계로 프란치스코 사랑과 프란치스코 닮기를 멈추고,
제 좋을 대로 살려고 하는 “육의 저”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저, 성령의 저는 틀림없이
저의 생각,
저의 고집,
저의 계획,
저의 편함에 저를 안주하게 하지 않고
프란치스코를 사랑하고 프란치스칸 카리스마를 살게 할 것입니다.
저와 프란치스코는 다르지만
프란치스코 안에서 복음적 열망을 불러일으키셨던 같은 성령께서
제 안에서도 복음적 열망을 불러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사랑했던 것을 저도 사랑하고,
프란치스코가 보던 것을 저도 보고,
프란치스코가 전하던 것을 저도 전하고,
프란치스코가 노래하던 것을 저도 노래할 것입니다.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바로 불효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와 나”라는 주제로 저를 반성하여 봤습니다.
프란치스칸으로서 나는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는가?
프란치스칸으로서 나는 프란치스코를 얼마나 닮았는가?
과거의 저는 정말로 프란치스코를 사랑했습니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그 어떤 성인보다도 사랑했고,
예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죄송스러울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큼 프란치스코를 닮았는지 제가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저는 사랑하는 것만큼 닮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언제부터일까요,
저의 사랑이 식었다고 할까요, 변했다고 할까요,
아무튼 전과는 다른 프란치스코 사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 흠뻑 빠져 있던 저의 시선을
프란치스코로부터 예수님께로 돌렸습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것이고 잘 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튼 프란치스코에게로 향하는 저의 시선이 줄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인 것 같습니다.
전에는 마치 단순한 요한이 프란치스코를 그대로 흉내 내듯이
프란치스코를 그렇게 닮고 싶었고 그대로 따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단식했다는 말에 저도 단식하려고 했고,
프란치스코가 돌을 베고 잤다면 저도 돌을 베고 자려고 했고,
프란치스코가 거지 옷을 입고 다녔으니 저도 남루한 옷을 입으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프란치스코로부터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린 그 시기부터
저는 프란치스칸이기도 하지만 ‘나는 나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프란치스칸이지만 프란치스코와 거의 모든 면에서 다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도 제가 저답게 하느님을 믿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제가 처한 상황에 맞게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프란치스코와 다른 소명을 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전처럼 우상숭배 하듯이 프란치스코를 사랑하고
내가 아닌 프란치스코가 되려는 듯이 프란치스코를 닮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글라라는 저에게 답을 줍니다.
글라라와 프란치스코는 너무도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로 다르고,
평민과 귀족으로 다르고,
나그네 삶과 봉쇄 관상의 정주적 삶으로 다릅니다.
그래도 프란치스코를 사랑했고 닮았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이상을 사랑했고,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작음을 사랑했고,
프란치스코의 십자가 사랑을 사랑했고,
프란치스코의 선교적 열망을 사랑했고,
사랑하는 바를 자기 삶에 맞게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문제는 저답게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저다운 것을 핑계로 프란치스코 사랑과 프란치스코 닮기를 멈추고,
제 좋을 대로 살려고 하는 “육의 저”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저, 성령의 저는 틀림없이
저의 생각,
저의 고집,
저의 계획,
저의 편함에 저를 안주하게 하지 않고
프란치스코를 사랑하고 프란치스칸 카리스마를 살게 할 것입니다.
저와 프란치스코는 다르지만
프란치스코 안에서 복음적 열망을 불러일으키셨던 같은 성령께서
제 안에서도 복음적 열망을 불러일으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가 사랑했던 것을 저도 사랑하고,
프란치스코가 보던 것을 저도 보고,
프란치스코가 전하던 것을 저도 전하고,
프란치스코가 노래하던 것을 저도 노래할 것입니다.
두벅 두벅 침묵하며 걸어갑니다 성인의빛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 눈물이 흐르는 것은
아직 제가 회개 할 것이 많은 것 입니다.
우리 사부님을 모시고 따르게 됨은 큰 은총 입니다.
달로 시선을 옮긴 지금,
"저다운 것을 핑계로 프란치스코 사랑과 프란치스코 닮기를 멈추고,
제 좋을 대로 살려고 하는 “육의 저”에 안주하는 것" 이 문제라는
신부님의 지적을 지팡이 삼아
"프란치스코가 사랑했던 것을 저도 사랑하고,
프란치스코가 보던 것을 저도 보고,
프란치스코가 전하던 것을 저도 전하고,
프란치스코가 노래하던 것을 저도 노래" 할 수 있기를 감히 청하고 바랍니다.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라는 명제 앞에서 한 인간으로, 사제로
고뇌하지 않을 수 없는 신부님의 그 진솔함이
그 어떤 고차원(?)적인 영성강의 보다 심금을 울리고,
그런 신부님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프란치스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만족을 되돌려 드리는,
이웃에게, 사람이 되도록 새로운 다짐을 해 보는 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축일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