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 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끔 우리의 보통 생각을 뛰어넘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도 청원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졸라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하느님은 졸라대지 않아도 어련히,
그렇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실제로 오늘 말씀 중에도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서야....”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앞에서는 졸라대라고 하십니다.
저는 졸라대면 더 주기 싫습니다.
그런데 졸라대면 더 주기 싫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끝까지 성취하려는 그의 욕심과 집착이 밉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의 자유로운 선의가 불신되고 무시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졸라대라고 하시는 주님의 본뜻은
하느님의 선의를 믿지 못하고 욕심 사납게 졸라대라는 것이 아니라
청원하는 자의 자세가 좀 더 간절해지고
좀 더 겸손해지라는 뜻일 겁니다.
그러므로 졸라댐은 간절한 졸라댐이어야 합니다.
저는 한 번 부탁하거나 요청해서 안 들어주면
더러워서 더는 부탁을 안 한다고 생각을 접습니다.
덜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옛날에 무전 순례 여행을 할 때
한 두 끼 굶으면 밥 좀 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고,
서 너 끼 굶으면 달라고는 하지만 한 번 거절에 단념을 하는데,
대 여섯 끼 굶으면 그제야 절박하고 간절하게 되어
어떻게 하면 얻어먹을 수 있을까 별의 별 궁리를 합니다.
그리고 이쯤 되면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버리게 됩니다.
간절함은 간절히 원하는 것 외에
다른 욕심 다 비우고 자존심까지 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함은 우리를 가난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덕은 덕의 꼬리를 무는 것이기에
가난함과 겸손함은 자유롭게 사랑하게 하고
진정으로 감사하게 합니다.
어제는 제가 잘 아는 부부와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얘기 중에 요즘 수도원을 다시 지어야 하는
글라라 수녀원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글라라 수녀님들은 봉쇄 관상 수녀님들이기에
자기들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같은데,
아는 신부님들의 본당에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문제에 있어서
형제님은 주저주저하는데 비해 자매님은 적극적이었습니다.
자매님 왈, “거절당하면 어때요. 내 할 바만 하면 되지요.”
여자가 남자보다 더 사랑하기에 자기 체면도 잘 버리고,
여자가 남자보다 더 겸손하기에 거절도 두려워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 두 분을 보면서 저 자신을 반성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이렇게 글라라 수녀원을 도우려하는데
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제가 오히려 돕지 않음은 물론
제가 하고 있는 북한과 새터민 돕기도 소극적인 것이
제가 겸손하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기 때문임을.
그러므로 절박함이 간절하게 하고
간절함이 가난하고 겸손하게 하고
가난하고 겸손함이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 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끔 우리의 보통 생각을 뛰어넘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도 청원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졸라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하느님은 졸라대지 않아도 어련히,
그렇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실제로 오늘 말씀 중에도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서야....”하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앞에서는 졸라대라고 하십니다.
저는 졸라대면 더 주기 싫습니다.
그런데 졸라대면 더 주기 싫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끝까지 성취하려는 그의 욕심과 집착이 밉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의 자유로운 선의가 불신되고 무시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졸라대라고 하시는 주님의 본뜻은
하느님의 선의를 믿지 못하고 욕심 사납게 졸라대라는 것이 아니라
청원하는 자의 자세가 좀 더 간절해지고
좀 더 겸손해지라는 뜻일 겁니다.
그러므로 졸라댐은 간절한 졸라댐이어야 합니다.
저는 한 번 부탁하거나 요청해서 안 들어주면
더러워서 더는 부탁을 안 한다고 생각을 접습니다.
덜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옛날에 무전 순례 여행을 할 때
한 두 끼 굶으면 밥 좀 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고,
서 너 끼 굶으면 달라고는 하지만 한 번 거절에 단념을 하는데,
대 여섯 끼 굶으면 그제야 절박하고 간절하게 되어
어떻게 하면 얻어먹을 수 있을까 별의 별 궁리를 합니다.
그리고 이쯤 되면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버리게 됩니다.
간절함은 간절히 원하는 것 외에
다른 욕심 다 비우고 자존심까지 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함은 우리를 가난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덕은 덕의 꼬리를 무는 것이기에
가난함과 겸손함은 자유롭게 사랑하게 하고
진정으로 감사하게 합니다.
어제는 제가 잘 아는 부부와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얘기 중에 요즘 수도원을 다시 지어야 하는
글라라 수녀원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글라라 수녀님들은 봉쇄 관상 수녀님들이기에
자기들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같은데,
아는 신부님들의 본당에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문제에 있어서
형제님은 주저주저하는데 비해 자매님은 적극적이었습니다.
자매님 왈, “거절당하면 어때요. 내 할 바만 하면 되지요.”
여자가 남자보다 더 사랑하기에 자기 체면도 잘 버리고,
여자가 남자보다 더 겸손하기에 거절도 두려워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 두 분을 보면서 저 자신을 반성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이렇게 글라라 수녀원을 도우려하는데
더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제가 오히려 돕지 않음은 물론
제가 하고 있는 북한과 새터민 돕기도 소극적인 것이
제가 겸손하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기 때문임을.
그러므로 절박함이 간절하게 하고
간절함이 가난하고 겸손하게 하고
가난하고 겸손함이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