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이 말씀은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의 미움을 받을 것이다.”는
말씀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때 얘기하는 인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지금 받고 있는 박해와 미움의 고통을 참아 견디라는 말씀이지만
그 이전에 닥치는 박해와 미움을 피하지 말 것이며
그 이후에도 박해와 미움을 해소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사실 박해와 미움의 고통,
심지어 죽음을 감수하려는 의지 없이 박해와 고통을 받아들이면
그것을 인내하는 것이 쉽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인내를 하더라도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감수하려는 의지 없이,
다시 말해서 피하고 해소하려는 데도 어쩔 수 없어
싫지만 박해와 죽음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어쩔 수 없어서 인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없는 인내는 인내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사랑이 아닌 인내는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낳는 어머니의 사랑과 인내와 같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의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위험을 무릅쓸 각오와 고통을 감수할 각오가
바로 사랑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의지로 아기를 수태하면 이제 인고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전에 지하철을 타면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자는 광고를 한동안 본 적이 있습니다.
임신한 여자의 배는 2-3kg의 책을 늘 배에 안고 다니는 거와 같다는
그런 그림으로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저와 같은 남자들에게
그 고통을 이해시키는 광고였습니다.
고통이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잠자고 움직이고 자세 취하는 것까지
그리고 심지어 말과 생각까지 10개월 동안 조심조심해야 하는,
아기로 인한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제가 헤아리지 못하는 고통,
여러분이 더 잘 알기에 여러분이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한 것은 심리적인 불안이겠지요.
혹시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난산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 고통이 엄청나다는데 잘 견딜 수 있을까 매우 불안할 것입니다.
아무튼 한 생명은 단지 출산 때 몇 시간의 고통만이 아니라
10개월의 이 고통들과 10개월 인내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내 아이를 위한 고통과 인내는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육신 생명의 탄생을 위한 것이고,
이제 영원 생명의 탄생을 위해서는 10개월이 아니라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식을 돌보고 뒷바라지해야 하고,
한시도 자식 걱정 떠날 날 없을 정도로 걱정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사랑이 아닌 의무로 하라고 하면,
그래서 억지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만이 온갖 고통을 인내케 하고
사랑만이 그 오랜 고통을 인내케 하며
사랑만이 그 인내로 생명을 탄생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의 미움을 받을 것이다.”는
말씀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때 얘기하는 인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지금 받고 있는 박해와 미움의 고통을 참아 견디라는 말씀이지만
그 이전에 닥치는 박해와 미움을 피하지 말 것이며
그 이후에도 박해와 미움을 해소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사실 박해와 미움의 고통,
심지어 죽음을 감수하려는 의지 없이 박해와 고통을 받아들이면
그것을 인내하는 것이 쉽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인내를 하더라도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감수하려는 의지 없이,
다시 말해서 피하고 해소하려는 데도 어쩔 수 없어
싫지만 박해와 죽음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어쩔 수 없어서 인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없는 인내는 인내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사랑이 아닌 인내는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낳는 어머니의 사랑과 인내와 같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의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위험을 무릅쓸 각오와 고통을 감수할 각오가
바로 사랑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의지로 아기를 수태하면 이제 인고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전에 지하철을 타면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자는 광고를 한동안 본 적이 있습니다.
임신한 여자의 배는 2-3kg의 책을 늘 배에 안고 다니는 거와 같다는
그런 그림으로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저와 같은 남자들에게
그 고통을 이해시키는 광고였습니다.
고통이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잠자고 움직이고 자세 취하는 것까지
그리고 심지어 말과 생각까지 10개월 동안 조심조심해야 하는,
아기로 인한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제가 헤아리지 못하는 고통,
여러분이 더 잘 알기에 여러분이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한 것은 심리적인 불안이겠지요.
혹시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
난산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 고통이 엄청나다는데 잘 견딜 수 있을까 매우 불안할 것입니다.
아무튼 한 생명은 단지 출산 때 몇 시간의 고통만이 아니라
10개월의 이 고통들과 10개월 인내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내 아이를 위한 고통과 인내는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것은 육신 생명의 탄생을 위한 것이고,
이제 영원 생명의 탄생을 위해서는 10개월이 아니라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식을 돌보고 뒷바라지해야 하고,
한시도 자식 걱정 떠날 날 없을 정도로 걱정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사랑이 아닌 의무로 하라고 하면,
그래서 억지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만이 온갖 고통을 인내케 하고
사랑만이 그 오랜 고통을 인내케 하며
사랑만이 그 인내로 생명을 탄생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추스리느라 늦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태를 맞아, 많이 걱정되고 더욱 분발해야겠다 다짐합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실감하지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자부심을 갖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기쁘게 하겠습니다.
용기와 힘을 주시는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익숙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평화의 복음이며,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하느님 자녀임을
마음에 새기며, 이 땅에 깨어진 평화의 회복과 화해를 기도하겠습니다.
남북이 왜 평화로워야 하는지,
왜 우리가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절실히 깨닫고
해야 할 실천을 하라는 주님의 뜻으로 저는 이번 사태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같이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