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화려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만이 아니라
마태오와 루카도 전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넓게 보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신 이야기부터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야기,
그리고 오늘의 변모 이야기까지
일련의 이야기들을 세 복음서는
순서도 바꾸지 않고,
중간에 다른 이야기도 넣지 않고
똑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 복음사가가
이 이야기들을 묶어서 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질문이 던져집니다.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침묵을 명하십니다.
그 누구보다 정확한 답이지만,
요한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어떤 예언자도 아니시지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밝혀지기까지는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화려함을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그리스도의 삶은
십자가의 죽음과도 연결되기 때문이고,
사람들은 그 연결을 생각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연결 고리를
베드로가 강하게 반박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십자가의 삶이기에
우리도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고는 엿새 뒤에
당신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앞의 세 이야기에서는
날짜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장소가 바뀌었다는 언급도 없어서
마치 하룻 동안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네 번째 이야기에 와서
복음사가가 엿새 뒤라고 말하는 것에서
우리는 일주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이야기로 이루어진 한 묶음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일주일로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일주일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과도
닮아있습니다.
누구는 이 일주일의 삶에서
마지막 날을 정점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마지막은 부활의 화려함이기에
지금의 수난과 고통을 참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의 엿새가 없이는
이렛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수난과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이 우리 삶의 정점이 되려면
수난과 죽음도 같은 비중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통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단지 영광으로 넘어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과정에 불과하기에 그저 참아 견디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
고통의 순간을 통해
고통받는 예수 그리스를 만나게 됩니다.
고통이라는 일상 속에서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변모된 예수님과 산 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과
연결됩니다.
화려함에만 머무르고 싶었던 제자들은
그것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 속에도
머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을 원합니다.
영광을 추구하면서 영광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냐 영광이냐를 판단하기에 앞서
나에게 주어진 삶의 순간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려고 할 때,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면서
더 큰 것, 더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