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오늘 복음의 얘기는 제 생각에 어떤 부자가 주인공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드시며 얘기를 시작하시는데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아니거나 부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라자로는 이름이 있는데
주인공인 부자는 이름이 없고 그저 어떤 부자라고만 합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은 그 반대로 라자로는 이름이 없고 그저 거지로 불리고,
부자는 오히려 그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을 테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름이 등록되지 않아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하느님 나라에 이름이 등록되지 않았을까요?
라자로에게 못할 짓을 하고 못살게 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그런 얘기는 나오지 않잖아요?
그러므로 라자로와의 관계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에게 한 나쁜 짓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무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는 악행을 한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고,
미워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일 뿐이며
악한 사람이 아니라 관심이 없는 사람 곧 무심한 사람일 뿐입니다.
성찰을 이렇게 하면 우리도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남에게 나쁜 짓 하지 않은 것으로 천당 갈 거라고 생각하고,
적어도 지옥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랑 없음과 관심 없음으로 인한 이 세상에서의 관계 단절이
하느님 나라에서도 이어져 모든 관계가 단절된 고립을 살 수밖에 없게 하지요.
비유에서 부자는 하느님은 아예 보지도 못하고 라자로와의 접촉만 시도합니다.
라자로를 보내어 자기를 돕게 하라고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큰 구렁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성찰을 합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것과
관계를 맺지 않고 고립을 사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부자는 자기의 집, 자기의 성 안에서 살았습니다.
자기의 성 안에는 부족한 것이 없이 다 있고,
그 안에서 자기와 가족들은 안전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문 밖의 라자로를 보면서도 마음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거나
마음이 불편할까 봐 아예 관심을 끄고 외면했을 겁니다.
자기의 성 안에서 부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는
오늘 독서 예레미야서 말씀처럼 하느님도 필요치 않았을 겁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는 주님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무관심에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 뿐 아니라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하느님 나라 무관심도 있고,
어쩌면 이것이 더 끔찍한 무관심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도
나자로에 대한 무관심보다 하느님 나라 무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비유의 끝에 자기 형제들만은 회개하여
지옥에 오지 않도록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다시 청하는데
이때 형제들이 해야 할 회개란 어떤 회개일까요?
그것은 무관심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 무관심이겠지요.
무관심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