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였습니다.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의 회심은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회개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보통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 있던 자신을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섬을 회개라 하는데
바오로는 자신이 얘기하듯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자신이 믿어온 하느님을 너무 열성으로 섬긴 나머지
우리에게 오신 임마누엘 하느님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얘기합니다.
너무 큰 빛으로 오셨기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한 것이고
너무 크신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셨기에
작은 이해의 그릇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며
전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하느님으로 오셨기에
낡은 믿음으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자신이 하는 얘기에 의하면
바오로는 눈부신 빛 때문에 볼 수 없게 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빛 때문에 우리는 보기도 하지만
빛 때문에 눈이 멀기도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6개월 동안 볼 수가 없었습니다.
빛에 눈이 너무 부셔 칠판을 볼 수가 없었고
밝은 빛에 나아가면 아예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빛, 어둔 빛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이고
빛이 너무 크고 밝으면 눈이 부셔 아예 눈이 멀어 버린 것입니다.
그때 시골이라서 마땅한 치료를 받지 못했기에
왜 그런 것인지 모르고 또 어떻게 낫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제 눈의 조리개가 아마 영양실조로 고장 나
작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실제로 북한의 많은 아이들이 지금도 영양실조로 실명을 합니다.
이렇게 고장이 나거나 실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어둔 곳에 있다가 갑자기 환한 빛 가운데 나아가게 되면
순간적으로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영적으로도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영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으로만 볼 수 있는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요한복음의 태생소경에게 시비를 거는 지도자와 같습니다.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본 것밖에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한하신만큼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안 것 이상으로
무한한 가능성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가능성의 현실태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볼 수 있기 위해서
지금까지 형성된 모든 고정관념의 비늘이 눈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교만의 단단한 각질이 떨어져
겸손으로 눈이 영과 신비에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영과 신비에 열려있는 새로운 눈으로
무한한 가능성이신 하느님을 보고
무한한 가능성의 현실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모든 조물들과 소통하는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에게 이런 눈을 열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절대로 자기 스스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너무도 고맙고 소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이제 그분께 자기 전부를 걸고
자신이 체험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였습니다.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의 회심은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회개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보통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 있던 자신을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섬을 회개라 하는데
바오로는 자신이 얘기하듯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자신이 믿어온 하느님을 너무 열성으로 섬긴 나머지
우리에게 오신 임마누엘 하느님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얘기합니다.
너무 큰 빛으로 오셨기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한 것이고
너무 크신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셨기에
작은 이해의 그릇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며
전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하느님으로 오셨기에
낡은 믿음으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자신이 하는 얘기에 의하면
바오로는 눈부신 빛 때문에 볼 수 없게 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빛 때문에 우리는 보기도 하지만
빛 때문에 눈이 멀기도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6개월 동안 볼 수가 없었습니다.
빛에 눈이 너무 부셔 칠판을 볼 수가 없었고
밝은 빛에 나아가면 아예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빛, 어둔 빛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이고
빛이 너무 크고 밝으면 눈이 부셔 아예 눈이 멀어 버린 것입니다.
그때 시골이라서 마땅한 치료를 받지 못했기에
왜 그런 것인지 모르고 또 어떻게 낫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제 눈의 조리개가 아마 영양실조로 고장 나
작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실제로 북한의 많은 아이들이 지금도 영양실조로 실명을 합니다.
이렇게 고장이 나거나 실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어둔 곳에 있다가 갑자기 환한 빛 가운데 나아가게 되면
순간적으로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영적으로도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영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으로만 볼 수 있는 하느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요한복음의 태생소경에게 시비를 거는 지도자와 같습니다.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본 것밖에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한하신만큼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안 것 이상으로
무한한 가능성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가능성의 현실태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볼 수 있기 위해서
지금까지 형성된 모든 고정관념의 비늘이 눈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교만의 단단한 각질이 떨어져
겸손으로 눈이 영과 신비에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영과 신비에 열려있는 새로운 눈으로
무한한 가능성이신 하느님을 보고
무한한 가능성의 현실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모든 조물들과 소통하는
무한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에게 이런 눈을 열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절대로 자기 스스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너무도 고맙고 소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이제 그분께 자기 전부를 걸고
자신이 체험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 해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