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양성을 오래 그리고 이것저것 많이 했지만
성소 계발은 청원장을 겸하여 1년 한 것이 전부입니다.
1년 성소 계발을 하면서 기억나는 사람이 딱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입회하지 않은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입회하여
저에게서 청원기를 보내고 이제는 저의 도반이 된 형제입니다.
먼저 입회하지 않은 사람 얘기를 하면
그는 계모 밑에서 컸지만 계모가 자기의 친모가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계모가 당신이 낳은 자식들과 똑같이 그를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인데
그것을 저를 찾아오기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물론 충격이 컸습니다.
부모가 원치 않은 그러니까 불장난의 결과로 태어났다는 것과
지금까지의 엄마가 갑자기 자기 엄마가 아니라는 것과
자기가 모르는 친모가 있다는 것 등이 충격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모가 그렇게 자기를 사랑한 것이 너무도 고마웠고,
수도자가 되려고 한 이유도 자기도 계모와 같은 사람이 되어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은 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련을 줬습니다.
계모처럼 되고 싶어서 수도자가 되려는 것은 좋지만
너의 출생이 부모의 불장난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요 성소임을 믿게 될 때,
그때 다시 오라고 하며 돌려보냈는데 그 형제는 결국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와 같이 살고 있는 형제도 제가 1년간의 시련을 준 형제입니다.
수도자가 되려는 열망이 얼마나 큰지,
특히 다른 수도회가 아닌 우리 수도회에 입회하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큰지
이 시련을 통해서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소에 대한 확고함이 얼마나 큰지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이 정도의 시련으로 자기에게 성소가 없다고 생각하고 팽개친다면
그는 수도원 들어와서도 수없이 성소가 흔들릴 것이고 떠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교만한 사람인지, 겸손한 사람인지.
어려움을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인지, 못견디는 사람인지.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시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해할 것이고 더 나아가 분노할 것이며
그 경우 이 시련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인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 지혜서를 보면 예언자의 적대자들도 이렇게 예언자를 시험합니다.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시련이나 시험을 받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시련과 시험을 받고
하느님의 사람답게 시련과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적대자가 시험을 해도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하느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을 것이고 하느님의 사람답게 받자는 것입니다.
앞서 봤듯이 겸손하지도 온유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시험을 받을 때 내가 이런 시련을 뭣하러 받느냐며 거부할 것이고
실제로 수도원 들어올 사람이 아니라면 성소의 시험을 받지 않듯이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시련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그것이 비록 적대자가 주는 시련일지라도
적대자의 손을 빌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사람에게 주시는 시련이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