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수난 주일 나눔을 하지 않고 성지 주일 나눔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껏 성지주일을 수없이 지내며 성지 축성을 하고 방에 달아놓고는
왜 성지를 1년 동안 방에 달아놓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이번에 문득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관습적으로 성지를 걸어놓았을 뿐이었습니다.
성지는 왜 축성하고, 왜 방에 걸어 1년을 보는 겁니까?
성지는 주님이 예루살렘 입성 때 밟으시라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옷과 함께 깔은 가지지요.
주님께서 자기들 도성을 찾아오시는데
아니, 주님께서 자기들을 찾아오시는데
어찌 맨 땅을 밟고 오시게 할 수 있는가? 그래서 깔은 거지요.
이는 큰 축제에 관계되는 귀빈을 모시고는 입구에서부터 주행사장까지
주단/레드 카펫을 깔아놓고 그것을 밟고 들어오게 함과 같고,
경우는 다르지만 김 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진달래 꽃길과 같은 거겠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그러니까 그 가지가 거룩한 가지인 이유는 주님이 밟으신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거룩함은 주님과 닿기 때문에 거룩한 거지요.
주님께서 와서 닿든 우리가 가서 닿든 주님과 닿아야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축일이랄까 주일의 거룩한 의미는 오랫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고 싶어하던 그 '간절한 닿음'의 의미이고,
연인의 손을 처음 잡을 때 떨면서 잡는 그런 '떨리는 닿음'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시는데 나와 상관없이 오시는 분인 듯
맨 땅을 밝고 오시게 해서는 안 되고 옷을 깔든 주단을 깔든 깔아야
주님은 내게 오시는 것이 되고 나의 옷이나 주단은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지를 깔고 옷을 까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대문을 활짝 여는 것이고 예루살렘 성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여는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에서 자주 이 시편을 노래하는데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후렴과 함께
"성문들아 너희의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임금님이 듭시려 하시나니. 영광의 임금님이 누구이신고.
굳세고 능하신 주님이시다. 싸움에 능하신 주님이시다."라고 노래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지를 축성하여 집에 가지고 가 자기 방에 다는 것은
한갓 장식이 아니라 그것을 볼 때마다 성사가 발생하기 위해 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뭇가지 성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거룩한 나뭇가지를 볼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합니다.
우리 집에 달았으면 우리 집 대문을 열겠다는 뜻이요
나의 방에 달았으면 나의 방 문을 열겠다는 뜻이며
나의 마음을 열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가지를 볼 때마다
우리 마음을 열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은 떨려야 합니다.
그래서 무딘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서는 아니 되고
간절하고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영접해야 하고,
무엇보다 대환영의 마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큰 소리로 환영하는 사람들을 보고 군중 속에 있던 바리사이가
그들을 꾸짖으시라고 주님께 청하는데 이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잠자코 있으면 안 되고
돌같은 마음이거나 돌들보다 못한 마음이 되어서는 더더욱 아니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