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모두 큰 은총을 누렸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이 한동안 사랑받았고,
아마 지금도 많은 이의 사랑을 받고 있을 겁니다.
그만큼 무소유의 삶이 아름다운 삶이고
가치있는 삶이라고 많은 이가 동의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게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모든 사람에게 그 삶은 불가능할 겁니다.
왜냐면 소유해야 무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진정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그래서 진정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무소유할 수 없습니다.
옛날 양로원에서 제가 잠깐 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한 할아버지께서 온갖 쓰레기를 당신 사물함에 쌓아놓으셨습니다.
먹을 것을 드려도 바로 잡숩지 않고 사물함에 두어 상하게 하시고,
밖에 나가 온갖 과자 봉지를 주워 와서 차곡차곡 쌓아두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일은 한 달에 한 번 할아버지가 밖에 나가셨을 때
그 사물함 청소를 해드리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사물함 청소하고 나면
할아버지는 의욕을 잃고서 멍한 상태에서 며칠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또 쓰레기를 모으기 시작하십니다.
왜 음식을 잡숩지 않고 쌓아놓고, 왜 그 쓸데없는 것들을 모으실까 생각하니
인생 말년에 당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인생이
너무 슬프고 가엾고 허전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고,
그래서 쓰레기로라도 당신 사물함을 채워놓으신 것일 겁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가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정말로 귀한 것을 소유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것으로 너무도 만족한 사람이요 아무 결핍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생각지 않고 공동체에 내어놓은 것은 성령 충만의 결과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한 루카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에서
악한 아비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선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냐고, 성령을 주실 거라고 얘기합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이 성령을 소유한 가난이
마태오 복음에서 말하는 영의 가난입니다.
현재 우리 번역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번역하였지만
원래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번역했어야 했지요.
우리는 흔히 버려야 가질 수 있다고 말하고,
소유욕을 버리고 가진 것도 버려야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소유해야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은 모두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더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을까요?
우물가의 여인처럼 아무리 뭣을 소유해도 갈증이 나고
그래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면 되면 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주실 터인데 그때 날름 받아 소유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