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하느님께서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바오로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해주셨다고 얘기하는데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리디아의 마음만 열어주셨을까요?
그럴 리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 여자들이 같이 듣고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리디아의 마음만 열어주셨겠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바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문 앞까지 오셔서 문을 두드린다는 말씀 말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문만 두드리시지 문을 여는 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하시는 말씀으로서
여기서 주님은 신자들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다고 나무라시며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마음의 귀는 있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억지로 여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기는 하시는데 그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 또는 영적인 마음의 귀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귀와 마음의 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육신의 귀는 성령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이고,
마음의 귀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귀는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말에 관심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성령의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느냐 그 말입니다.
저는 마음의 귀, 관심을 잠자는 귀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의 귀는 잠자고 있다는 말입니다.
잠자고 있는 마음의 귀에 성령께서는 계속 속삭이십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계속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겁니다.
실바람 소리로도 빗소리로도 청천벽력같은 소리로도.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처음에는 전혀 듣지 못하다가
또 두드리시면 어렴풋이 듣다가 계속 두드리시면
차츰 마음의 귀가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잠이 얼마나 깊이 들었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이 바짝 들어있는 사람이나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작은 소리에도 그리고 살짝 한번 건드리기만 해도 발딱 일어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깊이 잠든 사람의 귀를 깨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두드림과 더 강한 두드림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므로 나는 얼마나 깊이 잠들어있는 사람인지,
나는 얼마나 정신이 바짝 들어있는 사람인지,
프란치스코의 말대로라면 기도와 헌신의 영이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