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승천을 앞두고 주님께서는 당신이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이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했을 것이고
우리 중에도 일단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저는 이미 어른이었는데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사나 하는 마음이 들었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심으로 인해 고생하고 기죽어 산 저였기에
저도 일단은 마찬가지 마음이 들지만, 이단, 삼단을 생각하면 달라지지요.
저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심으로 일단은 고생하고 기죽어 살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해롭지만 않았던 것이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제 인생을 스스로 살게 했던 면이 있었고 그래서 일찍 어른이 되게 했지요.
요즘 아침에 출근할 때 보면 엄마들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며
아이 가방을 대신 메고 가는 것을 보게 되는데 저는 그것을 보고
그것이 아이에게 더 이로울까? 더 사랑일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더 잘 생각하면 '네 가방은 네가 메고 가!'라고 하는 것이 더 이롭고 더 사랑인데
그저 힘든 것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과 생각없이 그저 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우리 인간은 이렇게 일단의 작은 사랑과 얕은 사랑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앞서 봤듯이 단계로 치면 일단의 사랑에 그침으로써
사랑의 계단이 이단과 삼단으로 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것이 힘이 든다는 것은 힘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힘들지 않고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일은 없습니다.
힘들게 아령을 들지 않으면 알통에 힘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더 이롭다는 주님의 말씀도 이런 뜻,
곧 당신이 떠나면 힘이 들겠지만, 그래야 제자들이 당신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힘을 키워 더 이롭다는 그런 뜻인가요?
그런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격적인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떠나야 성령이 오시니 더 이롭다는 뜻입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이는 성령께 당신의 자리를 내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앞에 계시고 옆에 계시고 함께 계시던 주님이 떠나시면
이제 성령은 앞과 옆에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안에 계시게 됩니다.
성령의 자리는 밖이 아니라 안이라는 얘기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떠나시면 힘이 들어오는 정도를 넘어
성령께서 인격적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안으로 모셔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제자들 몫이고
지금 우리의 몫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에 계시고 옆에 계셔 볼 수 있었던 주님처럼 볼 수 없는 성령을
이제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감지해야 모셔들일 수 있을 텐데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지 그것이 관건입니다.
그런데 볼 수 없다면 차라리 눈을 감으면 되지 않을까요?
시각을 잃은 분들에게 다른 감각이 발달되듯
육의 감각을 잃으면 영의 감각이 생기고,
영의 감각이 생기면 영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