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는 카르멜산에 있습니다.
임금을 비롯한 이스라엘 온 백성 앞에 있고
그들 앞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러 와 있습니다.
현재 그는 혼자 남은 주님의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엘리야의 고독에 대해 묵상하고자 하는데
첫째로 그의 고독은 자신이 선택한 고독입니다.
제 생각에 그도 분명 고독이 두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거짓 예언자 450명 가운데 있는 것을 택할 수 있었지만
그는 혼자 남는 고독을 선택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고독이 두려워 죄 짓는 것을 선택하곤 합니다.
없는 사람을 흉 볼 때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그런 얘기하지 말자거나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심하게 성찰하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고백성사를 보는데
남을 흉 본 것과 고독을 두려워한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문제일까요?
남을 흉 본 것은 죄라고 생각하고 고독을 두려워함은 죄라기보다는 약함이라고
생각하기에 흉 본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고독을 두려워함이 더 큰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흉 본 것은 결과일 뿐 고독을 두려워함이 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뿌리 없는 열매 없듯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원인이 있기에 그 결과가 있는 것이니 원인이 언제나 더 문제지요.
아무튼, 우리는 고독을 죄보다도 더 두려워하고,
같은 맥락에서 왕따를 두려워하며 그래서 아이들의 경우
그 두려움 때문에 더 두려운 것인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미성숙한 아이에게는 왕따가 죽음보다 더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고독할 줄 아는 것은 성숙함이고,
고독할 줄 알고 고독을 견딜 수 있어야 어른입니다.
둘째로 엘리야의 고독은 하느님을 위한 고독입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하느님을 선택한 고독이고,
하느님의 진실을 알려야 하는 예언자의 고독입니다.
이렇듯 예언의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은 제 생각에 예외없이 고독하고
그러기에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어쩌면 예언의 사명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셋째로 엘리야의 고독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고독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고독이기에 하느님께서도 그와 함께 계시는데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해 고독을 선택했는데 하느님을 느낄 수 없고
그래서 하느님 없이 고독을 견뎌야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무서운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마더 데레사 같은 분들이 바로 이런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영혼의 어둔 밤을 체험하시면서도 믿음을 사신 분들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영적 지도자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하지요.
"하느님이 나를 원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이 하느님이 아니시고,
하느님이 진짜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끔찍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사실 하느님은 많은 경우 아니 계십니다.
아니, 아니 계신 듯이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는 그리고 우리도 예언의 삶을 산다면
고독한 믿음을 살고 믿음의 고독을 사는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