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들은 죄를 용서하는 주님에 대해 분노하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나무라며 당신 사랑의 행위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어떤 태클에도 당신 사랑이 막힐 수 없다는 듯이 행위를 이어가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멈추지 않는 주님의 사랑도 고맙지만
육신의 병을 넘어 영혼의 병까지 고쳐주시는 사랑이 더 고맙습니다.
중풍 병자가 당신께 왔을 때 주님께서는
육신의 병만 가엾이 보신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병까지 가엾이 보셨습니다.
아니,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병, 곧 죄를 더 가엾이 보셨습니다.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경우 육신의 병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과 영혼까지 병들었을 수도 있는데
오늘 중풍 병자도 어쩌면 이런 사람일 수 있을 겁니다.
육신의 병으로 인해 오히려 성덕에로 더 나아간 영적인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의 경우 육신의 병이 마음도 병들게 하거나
육신의 병 때문에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 수도 있으며
그런데도 그저 육신의 병만 고치려고 들 수도 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더 가여운 사람입니까?
육신이 병든 사람이 더 가엾습니까?
영혼이 병든 사람이 더 가엾습니까?
영혼이 죄에 억눌려 있고,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을지라도 정신이 육의 정신으로 가득하며,
존재가 미움과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런 사람이 더 가여운 사람이 아닐까요?
그래서 다시 또 묻습니다.
어떤 사람이 더 가엾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암에 걸렸을 때 의사를 찾아가는 사람과 주님을 찾아가는 사람 중에 누가?
병을 낫기 위해 약이나 음식을 챙겨 먹는 사람과 성체를 영하는 사람 중에 누가?
물론 우리는 둘 다 해야겠지만,
꼭 하나만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냐 그 말입니다.
사실 저는 환자에게 성체를 영해주면서 주님께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듯
이 환자의 병을 이 성체로 치유해주소서 하는 마음으로 영해줍니다.
실제로 우리는 성체를 영하기 전에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지금 이런 생각을 그저 관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수도자로서 삶을 마칠 때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이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병이 들거나 죽게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충실히 따르는 수도자로 죽어갈 수 있도록
오늘 중풍 병자처럼 저도 영혼의 죄까지 고쳐주시길 청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앓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리고 나는 앓는 형제에게 부탁합니다.
모든 일에 대해서 창조주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건강하든 병약하든 건강에 있어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십시오.
그러나 만일 누가 하느님이나 형제들에게 흥분하거나 화를 내고
곧 죽을 육신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너무 갈망한 나머지 조바심에서
지나치게 약을 요구한다면 이는 악에서 나오는 것이며 육적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영혼보다 육신을 더 많이 사랑하기에 형제다운 사람이 못 됩니다."
오늘과 내일 상반기 공동체 피정을 하러 갑니다. 그래서 부득이 강론을 올리지 못함을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