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이 하나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 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이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 두 가지를 얘기하는데
먼저 주님을 위해 뭔가 하는 것 곧 Doing 차원의 사랑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주님을 위해 뭔가를 하는 두 사람
곧 주님께 시중을 드는 두 사람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런데 똑같이 시중드는 일을 하는데 아브라함은 복음 받는 데 비해
오늘 복음의 마르타는 꾸중을 듣습니다.
꾸중이 아니라면 적어도 칭찬이나 복을 받지는 못하는 모양새입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기껏 주님을 위해 애를 썼는데 칭찬은커녕 꾸지람이라니!
그러면 마르타는 왜 기껏 시중들고도 지청구를 듣는 억울한 일을 당합니까?
아브라함과 비교하여 시중드는 일에 있어서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아브라함처럼 순전히 사랑으로 시중들면 그 시중이 사랑이 되고 복이 될 텐데
주님께는 불평했고 마리아에게는 시샘했기 때문에
순수한 사랑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마르타가 좀 더 현명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했으면 좋았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시중들면서 사라와 같이 시중들었습니다.
곧 사라를 초대하여 같이 시중들고 그래서 같이 복을 받았습니다.
마르타도 너무 바빴다면 조용히 마리아에게 가서 지금 너무 바쁘니
너도 좀 같이 시중드는 일을 하자고 초대했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가서 마리아보고 자기 일을 돕게 하라고 불평을 한 것입니까?
자기의 고생을 주님께서 인정해달라는 것이고,
마리아의 저 철없음을 질책해달라는 거였지요.
주님께는 인정받고 마리아하고는 비교를 했던 것입니다.
마르타도 주님을 사랑하여 시중드는 일을 한 것이 분명하지만
인정받고 싶은 것과 마리아와 비교한 것이 그 사랑의 불순물이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한 거라고 오히려 나무라신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한 거라고 하신 것을
마리아만 좋은 몫을 택한 것이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르타도 순수한 사랑으로 시중들었으면 그것도 좋은 몫이었을 겁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랑 곧 Being 차원의 사랑에 대해서도 보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도 해야 하지만,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일하느라 주님을 놓치거나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랑에 소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반대의 잘못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곧 주님과 함께 있으려고만 하고 주님을 위한 일은 하지 않으려는 것 말입니다.
이것도 사랑이 아닐 것이고 이럴 때 주님께서도 마냥 칭찬만 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것은 게으른 사랑일 뿐이고 영적 이기주의일 뿐입니다.
요즘 봉사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몸으로 하는 하느님의 일은 하지 않고 영성 강의 들으러는 열심히 갑니다.
이웃 사랑은 돈으로 곧 후원금으로 때우고 기도회에는 열심입니다.
그런데 영성 강의 듣고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지요.
하느님 사랑 까닭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게으른 것이 문제지요.
저희 식당에 봉사오는 분 중에 이런 면에서 정말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일이 있는데도 월차 휴가를 내서 오는 분이 있고,
새벽 일 마치고 피곤할 텐데도 와서는 묵묵히 일하고 가시는 분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런 분들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합친 분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르타와 마리아를 합친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