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2시에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2시 16분입니다.
두 시간 넘게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묵상했습니다.
몇 가지 생각들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사랑 말고 보고 싶은 이유가 있을까?
-보고 싶지 않은데 찾는 일이 있을까?
-보고 싶어 하는 것은 행복일까?
-보고 싶은 것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니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불행이 아닐까?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보고 싶은 사람이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불행할까?
-보지 못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단념하는 것은 현명한 것일까?
-보고 싶은 주님을 계속 찾아 헤매는 막달라 마리아와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찾기를 단념한 사도 중에
누가 더 불행하고, 누가 더 행복할까?
그런데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행복하지 않다면 이 축일을 우리가 왜 지낼까요?
그러므로 막달라 마리아 축일에 그녀가 왜 행복한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보고 싶은데 그 사람이 옆에 없는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보고 싶은 사람도 없는 것이 더 불행합니다.
사실 사랑 말고는 보고 싶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은,
사랑이 있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행복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더 행복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보고 싶어 찾아 헤맨 주님을 마침내 찾았기 때문입니다.
찾아 헤맸는데도 만나지 못했다면 고통스러운 행복으로 끝났을 겁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다행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다행多幸이란 한자어 그대로 행운이랄까 행복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의 행복이 아니라 여러 행복이 같이 있는 것이고,
겹경사처럼 겹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에게는 보고 싶어 하는 사랑이 있는 것만도 행복인데
마리아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만난 것이니 겹 행복입니다.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셨으니 다행이지
만나 주지 않으셨으면 막달라 마리가 주님을 찾아 헤맨 것은
끊어버려야 할 애착 또는 집착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찾아 헤맨 것이 애착이나 집착이 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찾아 헤매는 것만 애착이나 집착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은 애착이나 집착이 되고 맙니다.
다른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해줄 수 없거나 주지 않기에
애착이나 집착이 되고 말지만 주님께서는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주시고,
꼭 만나주시기에 우리의 사랑이 애착이나 집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막달라 마리아처럼 마음 놓고
주님을 보고 싶어 하고 찾아 나서도 되겠습니다.
당분간 강론을 올릴 수 없겠습니다.
아마 8월 2 일이나 3 일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 잘 지키시고 소임 잘 마무리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