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새 판 짜기.
관계의 재편.
관계의 가난.
이것이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탁 떠오른 말입니다.
오늘의 얘기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이 걱정되어 찾아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제 복음에서 본 바와 같이
악령에 들렸다느니,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느니
심지어 예수는 미쳤다고 하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애기를 듣고 가족들이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헌데 이렇게 당연하다싶은 가족, 특히 어머니의 걱정에 대해
예수님은 너무도 쌀쌀맞고 냉정하다 싶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이런 쌀쌀맞음과 냉정함은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보였지요.
예루살렘 순례 때 왜 가족과 떨어져 걱정케 하느냐는 어머니의 나무람에
예수님은 그 때 이미 당신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함”을 얘기하며
어찌 그것도 모르고 왜 쓸 데 없는 걱정을 하느냐는 투로 되받아치셨지요.
이것은 영락없이 제가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어머니께서 젊으셨을 때는 수도자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아시고
걱정되는 일이 있어도 전화를 하지 않으시더니
연세가 드시면서는 걱정이 드실 때 참지 못하고 걱정을 표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이제는 늙으셔서 그러시려니 하며 사랑으로 들어드리지만
한 번, 두 번이 아니고 반복되면 결국에 한 마디 쏴붙입니다.
그렇게 인간적으로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서운해 하시고 저는 마음이 아픕니다.
저야 이러지만 예수님은 다른 차원에서 그리 말씀하셨겠지요.
그것은 어머니를 무시하고 매정하게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를 하느님 중심으로 재편하시고
모든 사람을 하느님 중심으로 대하시겠다는 선언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리아의 자식만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으셨습니다.
당신도 하느님의 아들,
어머니도 하느님의 딸,
사람들도 하느님의 아들딸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어머니, 고모, 친구, 대부대녀, 사돈의 팔촌 등
나를 중심으로 얼기설기 얽혀있는 관계들을 싹 밀어내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관계가 재편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관계의 가난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을 때 피하셨고,
선하신 분으로 추앙받으실 때 선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라고 하시며
당신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관계의 중심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도 그러 하였지요.
자기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며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은 예수께,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아랫목을 내어드리는,
관계의 가난이 사랑의 다른 이름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그럼으로 그들을 당신의 형제와 어머니 삼으시는 사랑이
오히려 따듯하게 느껴지는 오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