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밭에 씨를 뿌리는 비유 얘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시지만
이 비유의 의미는 제자들에게만 설명해주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사람들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고,
그래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마르코 복음은 애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진정 주님의 의도였을까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듣게 하려고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우선 이렇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신비이고,
신비이기에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신비는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너나할 것 없이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누가 풀이해준다면 그나마 조금 알 수 있는 것이고,
신비, 곧 신적인 비밀을 풀이해줄 수 있는 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 곧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신비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풀이해주지 않고
오로지 당신 제자들에게만 풀이해주십니다.
왜?
그들은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알고자 하나 능력이 안 되는 사람과
알고 싶지 않은 사람 두 가지입니다.
먼저 알고자 하기는 하나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을 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알게 하지 않고 모르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모르게 해야 진정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형제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조심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먼저 살았기에 먼저 깨달은 것을
이제 막 알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답을 쉽게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려주면 “아!”하고 안 것 같지만 사실은 안 것이 아닙니다.
답만 안 것이지 전체를 안 것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안 것이지 자기의 깨달음이 되지 못합니다.
끙끙 알면서 깨달은 것만이 자기의 깨달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 그를 사랑하고,
진정 그가 하느님 나라 신비를 깨닫게 하려면
먼저 안 것을 뽐내며 알려주려 하지 말고
내가 안 것을 너는 왜 이리도 깨치는데 더디냐고 닥달하지도 말고
오히려 깨닫지 못해 끙끙거리는 그 아픔을 같이 아파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 문제가 우리에게 남습니다.
봐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의 뜻은 이제 알겠는데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노여움이고 포기하심입니까? 진짜 완전히 내치시겠다는 뜻입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끝까지 의심치 않는다면 이렇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신비를 알려고 하지 않는 자의 그 죄를
쉽사리 용서하지 않음으로 용서받지 못한 자의 고통을 겪게 하시지만
그것은 노여움이나 포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용서청할 때가지 용서하고픈 당신 마음을 참으시는 거라고.
용서받지 못하는 자의 고통을
용서하고픈 마음을 참는 고통으로 함께 하시며
마침내는 죄를 뉘우치고 용서 청하게 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라고.
인내하며 잘 기다리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