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구원 받을 사람이 적은지 주님께 여쭙는데
주님께서는 많은지 적은지 단순하게 답하지 않으시고 그 문이 좁다고 하시며,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아리송한 말씀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보다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까?
많은 사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도
주님께서 많다 또는 적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단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구원에 대해 얘기할 때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일부 이단처럼 묵시록의 십사만 사천 명을 들먹이며
우리 교회를 믿으면 그 안에 들어갈 거라고 얘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은 이 구절을 들어 자기 교를 믿어야
이 십사만 사천 명 가운데 들 수 있다고 하였다가
자기들 신자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을 넘으니 딴소리했는데 그래서는 안 되지요.
오히려 이 숫자의 의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두에서 오는 사람들과
열두 사도로 대표되는 신약의 모든 민족들에게서 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오늘 이사야서도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라고 얘기합니다.
이렇든 구원의 문은 모든 종교와 모든 민족과 모든 문화에 열려있습니다.
우리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얘기하고 싶겠지만, 그래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렇게 얘기하는 종교를 통해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문이 좁다는 주님의 말씀이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 땅 만드신 그님한테서”라는 시편 말씀처럼
구원은 사람에게서 오거나 지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한테서 오는 것임을
믿어야 하는데 그것을 진심으로 또 확고히 믿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할 자는
역설적으로 자기의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자신만만한 사람이고, 구원 교만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구원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겸손해야 합니다.
구원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행위나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 있는 것임을 아는 겸손이고,
그래서 나의 구원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고 자신하지도 않는 겸손 말입니다.
다음으로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할 자는 구원 무관심일 것입니다.
이것도 구원 교만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난 목요일 복음에서 임금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밭 갈러 가고 장사하러 간 사람처럼 그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구원받기 위해서는 지난 수요일 복음에서처럼
오후 다섯 시에라도 주님 포도밭에 일하러 가야겠습니다.
늦게 오더라도 구원의 좁은 문을 열어 주시는 주님임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구원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하지 않고 겸손해야지만
하느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지
문을 닫아걸고 안 열어 주시는 분이 아니며,
구원의 문은 좁지만 열려있는 문임을 우리고 알고 또 믿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