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은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세속적 기준으로 지혜롭고, 유력하고,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당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도록 어리석고, 힘없고, 비천한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택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속된 기준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 나오기나 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모든 능력과 지혜는 다 하느님께서 주신 건데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능력과 지혜와 출신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세속의 기준에서 지혜롭고, 유력하고, 고귀한 사람은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나는 그 후 세속을 떠났습니다.”라고 할 때처럼 세속을 떠난 사람이 아니라
세속 가운데 있는 사람인데 세속이란 말 자체가 하느님이 아니 계신 세상을
말하고 그런 사람은 세속 한가운데 있지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세속과 세상은 같은 듯 다릅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하느님 보시기에 선하고
하느님께서도 그 안에 계시지만 세속은 하느님이 아니 계신 세상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아무튼, 세속적인 사람은 하느님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여
그에게는 하느님께서 죽었거나 안 계십니다.
우선 세속적인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고 하느님은 무시합니다.
무시無視라는 말은 한자어로는 없다고 보는 것이고 우리말로는 업신여기는 겁니다.
저는 우리말에 자주 감탄하는데 업신여긴다는 말은
거의 틀림없이 ‘없이 여긴다.’는 말의 변형입니다.
엄연히 있는데도 없이 여긴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있는 자, 없는 자를 얘기하지만, 우리말에서도 있는 자, 없는 자를
얘기하고, 단지 돈이 없을 뿐인데 그런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을
세속에서는 없는 자로 취급하고, 아예 없는 존재인양합니다.
그런데 이런 세속적인 사람은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도 무시합니다.
그러면 이런 세속적인 사람을 하느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오냐오냐하고 내버려 두실까요?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에게는 또 어떻게 하실까요?
성모 찬가에 잘 나와 있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세속적인 사람의 또 다른 본보기가 오늘 복음에서 한 탈렌트 받은 사람입니다.
앞서 본 세속적인 사람이 하느님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복음에서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의 뿌리에 ‘하느님 오해’와 ‘하느님 모독’이 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은총의 하느님을 모질고 악한 분으로 아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또 어떻게 하실까요?
하느님께서는 그를 게으르고 쓸모없는 종이라고 하실 뿐 아니라
악한 종이라고 하시며 그를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은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세상에서 지혜롭고, 유력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내치시고,
세상에서 어리석고, 미천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