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어제는 수녀원 피정 지도를 갔다가 오랜만에 산에 올랐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운동기구가 있는 곳에서
허리 돌리기, 윗몸 일으키기, 팔굽혀펴기 등 운동을 한 다음,
몸을 풀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마른하늘에 무지개가 떠있었습니다.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희망과 밝음이 한 가슴 가득 들어옴을 느끼며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60대 남성이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안경을 끼고 있었기에 사근사근한 사람인지 무뚝뚝한 사람인지 몰라
망설이다 저기 무지개를 한 번 보시라고 권하며
“마른하늘에 무지개라니 참 신기하죠?”하고 말을 거니
무지개를 보고서는 저보다 더 신기해하고 행운으로 생각하며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으려는 줄로 생각하고
그것으로 무지개가 찍히겠냐고 물었더니
사진을 찍으려는 것이 아니라 무지개를 보라고 전화해주려는 것이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넘치는 기쁨이나 놀라움은 누군가와 꼭 같이 나누고 싶은 법이니
그 기쁨을 같이 나누고픈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한 것이겠지요.
모르는 여자에게는 좀처럼 말을 걸지 않는 제가 그분에게 용기를 얻어
다른 여자 분에게도 무지개를 가리키니 그 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려오는 내내 흐뭇함이 제 안에서 잔잔하게 계속 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치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원칙, 기쁜 소식은 기쁜 소식인 한 전하지 않고 가둘 수 없다.
두 번째 원칙, 기쁜 소식은 기쁜 소식인 한 누구나 기꺼이 받아들인다.
기쁜 소식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기쁜 소식이어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기쁜 소식이 못되는 것을 어찌 전하겠습니까?
확신이 없는 것을 얘기할 수 없듯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전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전하려 하지 않아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쁨은 만족감이기에 자신을 채우면 반드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한다면
아직 자신을 완전히 채우고 넘칠 만큼의 기쁜 소식이 아닐 것입니다.
둘째로 기쁜 소식은 기쁜 소식인 한 누구나 받아들인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나에게 기쁜 소식이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이 되는가 문제입니다.
어제 제가 모르는 이에게 무지개 뜬 거 알려주는 걸 주저하였듯이
기쁜 소식이 그에게도 기쁜 소식이 될까 망설일 수 있습니다.
실상 무지개 떴다고 제가 너무 그리고 마냥 기뻐하며 얘기해줬는데
무지개 뜬 것에 뭐 그리 호들갑이냐는 투의 반응이 되돌아온다면
제가 무지 머쓱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내게 기쁜 소식이라고 하여 남에게도 지금 기쁜 소식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강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그에게 맡기고
그저 내가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
곧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하면 될 것입니다.
내가 만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에 눈치를 본다면
기쁜 소식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거나 만드는 것이며,
내가 권한 것이 받아들여질까, 그렇지 않을까에 더 신경을 쓴다면
아직 복음보다 내가 더 중심이 되기 때문이고,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에게 집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사도들처럼
기쁜 소식에 확신을 느끼는 사람이 전할 수 있고
자기의 다락방을 박차고 나온 사람만이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어제는 수녀원 피정 지도를 갔다가 오랜만에 산에 올랐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운동기구가 있는 곳에서
허리 돌리기, 윗몸 일으키기, 팔굽혀펴기 등 운동을 한 다음,
몸을 풀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마른하늘에 무지개가 떠있었습니다.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희망과 밝음이 한 가슴 가득 들어옴을 느끼며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60대 남성이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안경을 끼고 있었기에 사근사근한 사람인지 무뚝뚝한 사람인지 몰라
망설이다 저기 무지개를 한 번 보시라고 권하며
“마른하늘에 무지개라니 참 신기하죠?”하고 말을 거니
무지개를 보고서는 저보다 더 신기해하고 행운으로 생각하며
즉시 휴대전화를 꺼내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으려는 줄로 생각하고
그것으로 무지개가 찍히겠냐고 물었더니
사진을 찍으려는 것이 아니라 무지개를 보라고 전화해주려는 것이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넘치는 기쁨이나 놀라움은 누군가와 꼭 같이 나누고 싶은 법이니
그 기쁨을 같이 나누고픈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한 것이겠지요.
모르는 여자에게는 좀처럼 말을 걸지 않는 제가 그분에게 용기를 얻어
다른 여자 분에게도 무지개를 가리키니 그 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려오는 내내 흐뭇함이 제 안에서 잔잔하게 계속 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치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원칙, 기쁜 소식은 기쁜 소식인 한 전하지 않고 가둘 수 없다.
두 번째 원칙, 기쁜 소식은 기쁜 소식인 한 누구나 기꺼이 받아들인다.
기쁜 소식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기쁜 소식이어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기쁜 소식이 못되는 것을 어찌 전하겠습니까?
확신이 없는 것을 얘기할 수 없듯이
자신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전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전하려 하지 않아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쁨은 만족감이기에 자신을 채우면 반드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한다면
아직 자신을 완전히 채우고 넘칠 만큼의 기쁜 소식이 아닐 것입니다.
둘째로 기쁜 소식은 기쁜 소식인 한 누구나 받아들인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나에게 기쁜 소식이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이 되는가 문제입니다.
어제 제가 모르는 이에게 무지개 뜬 거 알려주는 걸 주저하였듯이
기쁜 소식이 그에게도 기쁜 소식이 될까 망설일 수 있습니다.
실상 무지개 떴다고 제가 너무 그리고 마냥 기뻐하며 얘기해줬는데
무지개 뜬 것에 뭐 그리 호들갑이냐는 투의 반응이 되돌아온다면
제가 무지 머쓱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내게 기쁜 소식이라고 하여 남에게도 지금 기쁜 소식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강권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그에게 맡기고
그저 내가 해야 하고, 하고 싶은 것,
곧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하면 될 것입니다.
내가 만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에 눈치를 본다면
기쁜 소식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거나 만드는 것이며,
내가 권한 것이 받아들여질까, 그렇지 않을까에 더 신경을 쓴다면
아직 복음보다 내가 더 중심이 되기 때문이고,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에게 집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사도들처럼
기쁜 소식에 확신을 느끼는 사람이 전할 수 있고
자기의 다락방을 박차고 나온 사람만이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눔에...
오늘 초록 아침
마음에 무지개가 떴읍니다
왼지 아주 오랫만에 만나는 착한 사람과'
손 잡은 날 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