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오늘의 바오로 사도 말씀에 비춰서 저를 봤습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제가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지고,
더 행복해지고,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표시가 바로 선교입니다.
바꿔 말하면 신앙적으로 미성숙하고 그래서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 때,
사랑을 했어도 거친 사랑밖에 할 수 없을 때는 선교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미성숙했던 때는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라
저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찾는 데 급급했고,
나의 고통과 불행과 씨름하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는커녕
돌아볼 여유도 없었는데 20대 중반까지의 저는 이러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왜 살아야 하는지 복음에서 인생의 목적을 발견했고,
복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았으며,
그래서 복음에서 나의 행복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30대 중반이었고 이때부터 이웃을 사랑해야겠다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이런 제가 저만 이렇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 너무 미안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 특히 북녘의 동포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 30대 후반부터이고 지금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제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 더 나아가 불행한 사람,
사랑이 자기 사랑이나 가족 사랑에 머무는 사람은 선교할 수 없고,
행복하고 이웃 사랑이 있더라도 그 행복과 사랑이 복음 때문이 아니면
인도적인 실천을 할망정 복음 선포는 못할 거라는 점을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선포는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만 할 수 있고,
기도로 사랑이 충만해야지만 복음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봉사자들과 매일 식당을 여는 기도를 봉헌하면서
“주님, 오늘도 당신 사랑을 저희에게 부어주시어
저희가 당신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 사랑을 이 식당을 통해 나눔으로써
당신 복음이 이 지역 사회에 널리 전파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게 복음 선포는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라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저는 불행할 겁니다.
그러니 저는 제가 행복하기에 복음을 선포할 뿐 아니라
저의 행복을 위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요,
너의 행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저의 행복을 위해서 선포하는 겁니다.
너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너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나를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갈수록 더 느끼는 저이고,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는 저인데,
아직도 아쉬운 것은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사람을 얻기 위해
‘Omnibus, Omnia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지는 못하는 점입니다.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