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가엾어 하는 마음.
오늘 주님께서는 쉬러 가시지만 거기까지 쫓아오는 군중을 보시고
짜증을 내기보다는 가엾어 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진정 가엾은 것인가?
불교에서는 탐貪․진嗔․치痴의 무명無明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걸 깨침이 해탈이고 깨친 이가 성불한 사람, 곧 부처이며
이것을 모르는 무명 중생이 가엾고 불쌍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이 무명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제일 가엾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뮤코다당증이라는 희귀병을 앓는 두 아들을
20년 넘게 보살피다 지쳐 자살한 엄마의 얘기를 읽고는
그 가엾은 인생에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로 가여웠던 것은
희귀병을 앓는 아들을 둔 것과 가난한 처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희귀병과 가난한 처지가 가엾음의 전부이고 근본 이유였다면
병도 없고 부유한 사람은 불쌍하지도 않고 자살하는 사람도 없겠지요.
정말로 불쌍한 사람, 그래서
자살까지 하는 불쌍한 사람은 무명과 무지의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어리석은 사람은 물론 지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지요.
어리석은 사람이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
잘 못 아는 사람,
쓸 데 없는 것을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을 모른다는 것은
진리를 모르고,
왜 사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무엇이 참 행복인지 모르고,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한 마디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잘못 아는 것도 잘못된 지식이 아님은 말할 것 없겠지요.
그것은 악을 선으로 알고,
무의미한 것을 의미 있다고 하고,
무가치한 것을 가치 있다고 하고,
이 세상이 영원하고 천국은 없다고 하고,
한 마디로 편견과 착각 등으로 진실과 가치와 의미가 전도된 것입니다.
쓸 데 없는 것을 많이 아는 것,
이것이 어쩌면 지식만 많고 지혜는 없는 것이며
정작 알아야 할 것은 모르고 몰라도 될 것은 아는 것이겠지요.
살다보면 우리를 호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런 것들이 사실은 다 쓸 데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몰라도 되는 것일 뿐 아니라
아는 것이 어떤 때 우리가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그래서 많은 사람을 가르쳐주십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명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가르치시는 겁니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가르치신 다음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바로 배불리 먹이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몰라서 불쌍한 사람 가르치는 것을 먼저 하시고
배고파 불쌍한 사람을 그 다음 먹이신 것입니다.
주님, 어리석은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야겠습니다.